149호 [특집-열린 논쟁과 그 적들] 그 적 두 번째: “동양적 합리성”

동양과 합리성의 어색한 입맞춤

유권종 / 본교 철학과 부교수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동양적 합리성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얼마 전 유명한 국문학자이자 비평가의 일본 문학비평가의 작품을 표절한 사실을 밝혔던 서울시내 모 대학교 대학원생이 그 학과 교수들의 눈총과 압박을 받은 사건이 기사화되었다. 그 학과 교수들은 그 비평가의 제자이거나 학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건에서 그 대학 교수 한 사람은 학계의 존장(尊長)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는 것이 ‘동양적 합리성’이라고 해서 그 학생의 처신이 올바르지 않음을 지적하고, 그 학생이 더 이상 반발하고 항의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대화 속 화자와 청자의 간극
원래 말이라는 것은 화자의 입을 나오면 그 음상(sound image)이 청자에게 감지된다. 그리고 청자는 그 음상을 받아들이면서 평소에 자신이 알고있는 의미를 그것과 결부시킨다. 이 과정은 일종의 심리적 연합으로서 청자에 의하여 주도된다. 까닭에 어떠한 말을 듣고 그 의미를 떠올리고 그것을 납득하는 작용은 화자가 던진 말이 단초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청자에 의한 구성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똑같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마다 달리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 사건에서 화자였던 교수와 청자였던 대학원생 사이에 오갔던 ‘동양적 합리성’이라는 음상과 연합된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추론해 보도록 하자.

사건에 관한 기사를 보면 ‘동양적 합리성’을 사용한 사람은 교수이다. 그리고 대학원생은 교수가 그 말을 사용했을 때에 그 말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이해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두 사람이 ‘동양적 합리성’이라는 음상으로써 구성하였던 의미는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대학원생은 그 말에 대하여 심한 거부감을 지녔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지녔다. 그러므로 화자와 청자가 음상에 따라 이해한 문자적 의미는 같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구성한 의미의 세계는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 것인가. 화자는 그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청자는 그것을 하나의 악덕으로 판단하고 거부하였던 것이다. 하나의 불일치가 아닐 수 없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끼리 같은 음가를 지닌 언어를 사용하면서 의사소통에 불일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동양적 합리성의 내용에 하자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청자나 화자가 각각 알고 있는 동양적 합리성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동양적’이라는 말을 잠시 가려두고 ‘합리성’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자.

공경이 아니라 순종을 원하는가
원래 합리성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rationality 혹은 reasonablity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들은 어떠한 언어나 행위 또는 사안이 이성적으로 설득 가능한 성질을 지칭한다. ‘이성적’이란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또 가치로 볼 때에 도덕적 선이 배제되지 않는 것을 형용한다. 남의 글을 아무 표시없이 도적질하는 표절이란 도덕적 선 내지 사회정의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합리성과 대립되는 성질을 지니는 일임에 틀림없다. 청자인 대학원생의 입장이 정당화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합리성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는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합리성이 있음을 내세우고 대학원생의 행위의 정당성의 근거를 허무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동양적이라는 형용어를 붙인 별도의 합리성이다. 그러나 이 경우 동양적 합리성이란 말은 그러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는 왜 그런가. 우선 화자가 사용한 동양적 합리성은 그것이 비록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표절이라는 도덕적 불선(不善)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기는커녕 거부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비록 동양적이라는 형용어를 씌웠다고 하더라도 이는 합리성이라는 명사가 담아야 할 내용, 즉 실질이 잘못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동양적 합리성이란 명칭이 담아야 할 실질은 무엇인가. 합리란 이치에 부합한다는 의미이므로 동양인들이 과거에 리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들이 합리성의 범주에 들어올 수 있다. 유교를 기준으로 말하면 인·의·예·지가 대표적이다. 인, 의 혹은 지는 방식과 분야에 차이가 있더라도 모두가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고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거부하고 근절하는 태도의 덕목이다. 그것을 언행으로 표출하는 규범인 예도 그것과 어긋난 것이 아니다. 공경을 덕목으로 삼는 예라고 하더라고 그것은 단순한 순종은 아니다. 오히려 상호 관계를 맺는 쌍방의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순수한 처신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것이 예이다. 즉 불의, 불인을 외면하거나 시시비비를 분명히 하는 지를 무시하는 것은 비례(非禮)이다.

동양적 합리성은 형용모순
다만 우리는 은악(隱惡)과 양선(揚善), 즉 남의 악은 가려주고 남의 선은 드러내는 유교의 성왕인 순(舜)임금의 도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교화의 방편인데, 그 목적은 선을 권장하는 데 있지 악을 은폐하는 데 있지 않다. 혹시 화자의 생각은 이것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더라도, 이는 범주를 잘못 택한 것이다. 만일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하여 순종하고 가려주기로 한다면, 그것은 시정잡배들의 불량한 의리와 다를 바 없다. 특히 학문의 영역에서는 무엇보다도 진실이 우선하는 가치이다.
표절에 의하여 가려진 진실을 밝히는 것, 이것은 학문의 영역에서는 무엇보다도 으뜸가는 중요성을 지니는 일이다. 그리고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떳떳하게 밝히는 일이야말로 동양의 선비들이 목숨걸고 구현했던 의리 정신과 통한다. 그러므로 화자가 언급한 동양적 합리성은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동양적이라는 형용어를 붙이더라도 합리성은 결여된 것이 이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 관한 한 ‘동양적 합리성’은 형용모순에 해당하는 잘못된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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