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특집-쓰기와 말하기] ‘자폐적 글쓰기’의 대화적 치유법’

진중권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소크라테스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대화체로 글을 썼다.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문체의 글을 남겼다. 당시에 대중들을 위한 글쓰기는 흔히 대화체로 쓰여졌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대화체의 글을 썼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아카데미 강의를 위해 준비한 논문체의 글뿐이다. 당시에 논문체의 글은 대중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자기의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대중을 위한 글쓰기조차 대화체가 아닌 독백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말에서 글로 그 형태를 바꿔왔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다르다. 우리가 흔히 ‘수사학’이라 부르는 ‘rhetoric’은 원래 글에 붙는 장식의 기술이 아니라 ‘말을 하는 기술’이었다. 그리스 고전기를 지나 헬레니즘 시대에 이미 ‘수사학’은 더 이상 말이 아니라 글쓰기의 기술이 되어버렸지만, 『숭고에 관하여』를 쓴 롱기누스의 경우에도 ‘수사학’은 오늘날 우리가 그 낱말에 부여하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수사학의 최고목표는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 설득을 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글로써 대중을 “도취”시키는 데에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롱기누스의 수사학이 군중들 앞에 서서 말로써 그들을 도취경에 빠뜨렸던 고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초기 수사학의 목표는 글로써 대중을 “도취”시키는 것이었다
‘말하기’와 ‘글쓰기’는 각각 다른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자취가 남는 ‘글쓰기’의 효과가 때와 장소를 초월하는 ‘논리의 함수’라면, 자취가 남지 않지 않는 ‘말하기의 효과’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즉 ‘상황의 함수’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말할 때보다 글을 쓸 때 더 조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글’은 그것이 쓰여지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비판적 검증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말’은 그것이 발화되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만을 책임지면 된다. 때문에 ‘말’은 ‘글’과 달리 논리적 책임감은 덜 지는 대신, 글보다 더 많은 상황적합성의 요구를 받게 된다. ‘말하기’에서는 논증보다는 예증, 논리보다는 힘, 정확성보다는 위트와 기지가 더 중요하다.

글을 잘 쓰는 것과 말을 잘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말하기’는 항상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있는 특정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 따라서 ‘말하기’의 효과는 (1) ‘말’ 그 자체의 논리성과 문학성 외에도 (2) 그 말이 발화되는 시간, 공간, 청자라는 또 다른 변수들의 함수로 볼 수 있다. 때로는 (1)보다는 (2)가 말하기의 효과를 더욱 더 많이 규정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1)을 무시하고 오로지 (2)에만 호소하는 ‘말하기’를 우리는 흔히 ‘선동’이라 부른다. 논리성과 문학성이 없는 ‘말’도 때로는 대중을 설득하고 나아가 도취시키기까지 한다. 가령 히틀러의 연설을 생각해보라.

말과 글의 근본적 차이는 시공간의 제약여부
글쓰는 이들이 때로 말하기에 능하지 못한 것은 ‘글쓰기’의 규칙을 ‘말하기’에까지 적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글쓰기라는 것은 대개 구체적인 시공을 초월한 영원의 상(相) 하에서, 구체적인 인간들이 아니라 이상적 독자를 향해 행해진다. 그리하여 글쓰는 이는 이 규칙을 말하기에 그대로 적용했다가 구체적인 시공에 사는 구체적인 인간들을 설득하거나 도취시키는 데에 종종 실패하고 만다. 특히 대중 매체 앞에 나가서 말을 할 때 글쓴이는 갑자기 독백만 하던 수줍은 아이가 대중 앞에서 말을 하도록 강요받는 것처럼 당황하게 된다. 이럴 때 어린아이는 울어버릴 수나 있지, 어른이 되어서 울어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글쓰기를 이끄는 것은 ‘진리의 추구’라는 원리다. 그러나 마찰 없는 평면의 가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질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말하기는 ‘힘의 추구’라는 원리에 따른다. 특히 현실 속에서 상대를 앞에 놓고 혀로 논전을 벌일 때에는 ‘승리’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글쓰기에서 과장과 트릭과 오류추론을 한다면 곧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나, ‘말하기’에서는 즉석에서 가려지는 승부가 더 중요하다. 때문에 그릇된 주장이 과장과 트릭과 오류추론만을 통해 대중 앞에서 승리를 거두는 경우도 있다.

글쓰기는 이상적 공간에서 말하기는 구체적 현실에서
현실은 ‘진리’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움직이는 것은 ‘힘’이다. ‘진리’ 없는 ‘힘’은 맹목이고, ‘힘’ 없는 ‘진리’는 공허하다. ‘진리’ 없는 ‘힘’은 파시스트의 원리이고, ‘힘’ 없는 ‘진리’는 나약한 관념론자의 원리이다.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확보한 ‘진리’에 ‘힘’을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글쓰기와 함께 ‘말하기’의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사실 글쓰는 이가 굳이 말까지 잘 할 필요는 없다. 다만 글쓰기에 말하기의 원리를 결합시키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하지 않은가?

글이 독백이라면 말은 대화의 구조를 내포한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듣는 이의 존재를 상정하는 ‘말하기’의 대화구조를 글쓰기에 도입하는 것은 독백 밖에 할 줄 모르는 글쓰는 이들의 지적 자폐증을 치유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글쓰기가 이상적 공간에서 움직인다면 말하기는 구체적인 현실의 맥락에서 행해진다. 따라서 말하기의 원리를 글쓰기에 도입하는 것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늘 지당하기만 한 얘기만 하는 글쓰는 이들의 현실 자폐증을 치유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말하는 글. 그런 글쓰기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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