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특집-표현과 권력] 열받은 설은 다른 설들을 설설기게 한다

김상철/편집위원


어떤 일본 학자는 철학의 종류를 동굴의 철학, 수도원의 철학, 광장의 철학으로 구분했다. 동굴의 철학은 자기 스스로의 완결성을 추구하며, 수도원의 철학은 자기들만의 완결성을 추구하며, 광장의 철학은 우리들의 완결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각각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에 말이나 글을 통한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독립적인 동굴이나 또래의 수도원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말과 글의 육체성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은 글쓴이나 말한 이를 광장에 불러들인다.

담론편향의 논리는 현실의 권력관계를 왜곡할 수 있다
콘텍스트를 벗어난 글이나 말은 존재할 수 없다 했을 때, 그것은 그것을 발설하는 개인의 구체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본질적으로 그 말이나 글이 가지는 현실적인 상황적 효과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발설의 효과가 지니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을 둘러싼 논쟁이다. 복거일은 순전히 실용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그가 지론으로 삼고 있는 ‘자유주의자’의 공준에 따라 그와 같은 주장을 했다고 밝혔다. 논쟁의 과정에서 고종석은 복거일의 주장을 ‘개인적 측면’에서 옹호했다. ‘영어공용화론은 하나의 주장일 뿐 그것을 가지고 복거일 개인이나 전체 논지를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요한 논지였던 셈인데, 현실에서 불거진 권력차원의 논의를 담론차원의 논리로 희석시키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문제점은 이후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타난다. 꼬마들이 영어로 주절거리는 것이 더 이상 텔레비전의 선정성에 부합되는 사례가 벗어난 지는 오래고, 영어 능력이 입사의 중요기준이 되는 것에서 대학의 학위를 받는데 까지 필수적인 관문이 되었다. 복거일이 착각(혹은 의도)한 것은 그의 주장은 어쩔 수 없이 광장, 즉 이미 짜여진 세력 관계에 놓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복거일을 둘러싼 논쟁에서 짜증이 나는 부분은 복거일과 다른 영어공용화론자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의 양비론 이다.
그들은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문제를 삼는 것은 그 말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할까. 우리의 자유주의는 하나의 사상이라기 보다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일종의 지적 퇴폐로 남은 감이 없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김영명의 『나는 고발한다』는 분노라는 정서에 기댄 책이다. 물론, 그 책의 논조는 매우 공손하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국한문 공용을 외치는 조동일을 비판할 때나, 글러벌 애티켓 등의 ‘장난’을 치면서 TEPS라는 자사 상품판매에 열을 오리고 있는 조선일보를 비판할 때도 그렇다. 자고로, 뫼비우스의 띠같이 모든 논쟁의 결과들을 교묘하게 현상유지의 메카니즘으로 흡수해버린 상황에서 가능한 방법이란 ‘판 깨기’밖에 없다. 분노라는 감정에 기대어 나오는 글을 제도의 그리고 권력의 중심에서는 벗어난 사람들에 의해 나올 수 밖에 없다. 강준만이 『인물과 사상』을 통해 보여주는 글은 분노의 글쓰기가 보여줄 수 있는 전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가 글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그 글을 통해 불러일으키려는 효과에 주목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비판을 받았던 대다수의 인사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반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적 문제는 일상적 분노의 표출로 해결 가능
손호철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는 올해 새로 낸 책에서 97년 대선 정국에 대한 자신의 전망을 비판적으로 재점검하면서도 강준만의 비판 내용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강준만이 정치학 비전공자라서 그런가. 하지만, 백낙청과 ‘분단체제’논쟁에서 손호철은 나름대로 최대한의 논지를 전개하지 않았던가. 이유는 분명하다.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준만의 저널적인 글쓰기에 스스로가 말려들 필요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강준만이 비판한 것은 손호철이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한 글들이었다. 결국, 손호철의 묵묵부답은 하나의 지적 교만일 뿐이다. 또한 안티 조선운동에 대해 ‘다양성’운운하는 것은 화가 난다. 그 동안 지적 다양성을 ‘빨간 칠’ 해대며 막은 신문이 어떤 신문이며 군사 정권 하에 할 말 제대로 못한 신문이 도대체 어떤 신문인지 묻고 싶다. 또한, ‘보도하는 것은 신문사 재량이지 우리에게 탓할 문제는 못된다’고 주장하는 『문학동네』는 전형적으로 ‘순진함의 유혹’을 이용한다. 남진우의 글에 반박하는 이들의 주요 주장은 ‘왜 보론 형식으로까지 김정란의 비평활동을 언급했어야 되는갗로 집중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문학권력’이라는 특수어를 사용한 것에 비추어 보면 그간의 논쟁에 대한 개입으로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순진한 얼굴로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버리면 우리는 ‘얜 모른데’하고 넘어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열을 받고 열변을 토하게 된다. 강준만의 비아냥거림에 신경이 거슬려 그가 왜 그런 글쓰기를 하고자 했는지를 배제해버리는 것은,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이들을 강단으로 불러 ‘자네 구호가 왜 그렇게 편협한갗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임지현은 자기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인용하면서까지 「조선일보」를 이용의 대상으로 정당화시키고, 강준만식의 비판을 성채의 정치로 비판했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그의 ‘내 안의 파시즘’이 바로 또 하나의 성채가 되어 버릴 줄은. 결국, 그는 자기 안의 파시즘을 부둥켜 안고 『당대비평』을 떠나 자신의 성채로 들어가 버렸다.

분노는 당대의 문제점을 안고 싹튼다. 그 감정선이야 말로 감염성을 높으면서도, 활동 호르몬을 급격히 증가시키는 역동성의 근원이다. 모든 것은 관성이 있기 마련이지만, 분노라는 감정은 관성만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일상적 분노는 일상적 문제에서 불거질 것이며,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분노는 소크라테스의 쇠파리처럼 우리의 엉덩이를 괴롭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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