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호 [꽁트] 우리시대의 통과의례, ‘性’

남병장의 ‘잃어버린 모자’를 찾아서

남경완 / 시인, 작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8년 전 일이다. 8년 전 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날짜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해 대통령선거가 12월 18일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원래 나의 입대예정일은 12월 15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통령 선거 때문에 19일로 연기됐다. 그러니까 대통령 선거만 아니었더라 나는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지 모른다.

  1992년 12월 16일. 2월 달에 입대예비영장(입대예정일이 적힌 관제엽서)을 일찌감치 받아놓고서도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다 어영부영 날이 가고 달이 가 어느덧 12월,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인 삼국지(S대 2명, K대 3명, 그리고, C대 1명으로 각 대학의 이니셜을 따 91년 10월에 결성된 경기고등학교 87회 동창모임) 멤버들이 크리스마스 계획을 세우기 위해 모였다. 콘도 얘기가 나오고, 스키장 얘기가 무르익어 갈 쯤 나는 소주를 스트레이트로 연속 3잔을 비운 후 폭탄선언을 하듯 군대 간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던졌다.

  “나 간다.”

  “벌써 가게?”

  눈치 없는 S대 친구 한 명이 집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스트레이트로 한잔을 더 마신 후에 그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폭탄선언을 해야 했다.

  “나 군대 간다.”

  술판은 순식간에 파장 분위기로 변해버렸다. 멤버들 중에 첫 타자로 군대에 가게 된 것이었다. 대부분 고시를 생각하고 있는 야심찬 놈들(삼국지라는 이름에는 다음에 세상을 한번 평정해 보자는 원대한 속뜻이 담겨 있었음) 이어서 군대는 머나먼 일이었다. 따라서 조직원 중에 첫 번째로 군대를 가게된 일은 중대한 일대 사건이었다. 일순간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개구리처럼 혼미한 상태에 빠졌던 멤버들을 깨운 건 재수를 하느라 조직에 1년 늦게 들어온 S대의 안군이었다. 안군은 몇 군대 전화를 걸더니 바로 다음날로 E여대 독문과 92학번들과 미팅을 주선한 것이었다. 안군의 간곡한 부탁으로 머리 깍는 것을 하루 더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E여대 6명과 우리 멤버들 간의 미팅이 시작되었다.(사전에 퀸카를 나에게 몰아주기로 약정이 돼있었다.) 폭탄처리는 이미 E여대 다니는 애인이 있는 K대의 김군(얼마 전 그녀와 7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식을 올리고 강남구 삼성동에 신혼집을 차렸음)이 맡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미팅에 나온 E여대 독문과 92학번들은 장난이 아니었다. 워낙 급조된 미팅이었기에 별 기대 없이 나갔는데 퀸카가 셋씩이나 들어 있었다. 나는 녀석들의 눈치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멤버들의 강철같은 조직력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스톱팅, 이순자팅, 전두환팅을 거쳐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멤버들이 퀸카를 차지하기 위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시간쯤 지났을까. 3대 3조별로 나눠 진행하자는 의견을 먼저 낸 것은 폭탄처리를 하기로 한 K대의 김군이었다. 결국 퀸카 셋과 멤버 셋이 빠져나가고, 나와 미팅을 주선을 S대의 안군 그리고 머리가 워낙 커 슈퍼대가리로 불렸던 K대의 신군이 남게 되었다. 퀸카들이 빠져나간 구멍은 컸다. 그러나 더 마음 아팠던 것은 K대 김군을 포함한 친구들의 배신이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썰렁함 그 자체였다. 한가지 기억할 만한 사실은 미팅을 주선한 S대의 안군이(결국 행정고시에 합격 산업자원부에서 에너지정책을 담당하다가 지난 10월 18일 공군장교로 입대) 노래방까지 가서 폭탄 2개를 처리하며 장렬히 산화했다는 사실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동네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밀었다. 그리고 그날 밤늦게 돌아오신 아버지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귀까지 덮을 수 있는 밤색 방한모자를 내주셨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러니까 문제의 1992년 12월 18일 오전 열시 쯤 폭탄 처리반이면서 배신을 행한 K대의 김군(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애인이 있었던 김군은 여자친구에게 자신의 지도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종신회장을 맡고 있었음)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일은 미안하게 됐다고. 그리고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한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면서 알 듯 모를 듯 끈적끈적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었다. 나는 약속장소로 나가기 전에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봤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 이제 진짜 가나보다 생각하니 문득 서러움 비슷한 것이 밀려들었다.

  오후 4시부터 압구정동에서 시작한 술자리는 2차 신천, 3차 잠실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천호동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밤 10시경 천호동 사거리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잔 더 땡긴 후 김군이 미로같은 골목길로 우리 일행을 이끌었다. 당시엔 미아리 청량리와 트로이카를 이루던 곳이 천호동 텍사스촌이었다. 그러나 그 골목에 들어선 순간 우리 멤버들은 기가 죽어버렸다. 분홍 불빛 속에 서성이는 여자들과 그 골목의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다. 4차가지 마신 술이 확 깨버렸다. 한 여자가 다가와 K군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잘 해 드릴께요?”

  “우… 우리…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K군이 말을 더듬었다.

  나머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동네주민이었다.

  S대의 안군이

  “우리집이 이 골목 지나서 있어요.”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골목을 지나서 오른편으로 꺾어져서 대로로 나가 한길을 건너 버스를 타고 1시간은 가야 안군의 집이다. 완전히 장에 나온 촌닭들이었다. 하긴 강남 8학군에서 공부만 한 샌님들이 뭘 알겠는가. 계속 붙드는 여자들 사이를 용케 헤치고 빠져나갈 쯤 한 여자가 멤버들 사이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왔다. 휙, 뭔가 내 머리 위를 시치는가 싶더니 머리 위가 서늘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쏜살같이 골목으로 사라졌다. 모자를 벗겨 달아난 것이었다. 그것이 결정타였다. 멤버들 중 아무도 모자를 찾으러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 모두 얼어 붙어버렸다. 겨울 찬바람의 긴 혓바닥이 머리통을 핥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얼굴이 상기됐다. 싫다고 하면서도 따라온 내 속마음을 까발린 느낌이었다. 신도림역에서 홀딱 벗은 듯한 수치심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골목 끝에서 김군이 이대로는 갈 수 없다며 용기를 내 한 집을 찾아들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오만 원”

  “사만 원”

  “오만 원”

  “사만 원”

  “사만 오천 원”

  “사만 원”

  아가씨가 오만 원을 불렀고 김군은 사만 원을 불렀다. 그러자 아가씨가 사만 오천 원을 불렀는데도 김군은 끝까지 사만 원을 고집했다. 윈도우 안에서는 아가씨 다섯 명이 우리를 향해 방실방실 웃음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아가씨들이 내 맨머리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았다.

  “사만 오천 원 “

  “사만 원”

  “그러면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자니까요?”

  안쪽으로 이끄는 여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김군은 필사적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의 무용담을 자랑하던 김군이었다. 그러나 김군은 거래(?)를 할 뜻이 없어 보였다. 김군은 막무가내로 사만 원을 부르는 것이었다. 아가씨가 어서 빨리 포기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때, 만약 아가씨가 사만 원을 불렀으면 김군은 절망적으로 다시 삼만 오천 원을 불렀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 자식들아 깎을 것을 깎아라. 별 그지 같은 것들이, 그리구 너! 내가 그냥 해 줄 테니까 들어와”

  뒤편에 있던 아가씨가 손가락으로 흥정을 하던 김군이 아닌 나를 가리키며 침을 뱉듯 한마디 던졌다. 나머지 멤버들과 아가씨들의 시선이 모두 내 머리통으로 쏟아졌다. 결국 장에 갔던 촌닭이 팔리지도 못하고 비만 맞고 돌아온 것처럼 우리는 그 골목을 빠져 나왔다. 다음날 새벽 나는 문민정부의 서막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논산훈련소로 입대했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