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걷기...다양한 의미망 구성하는 경관의 미학

이무용 / 서울대 지리학 박사수료



아침 6시, 오디오 타이머의 작동과 함께 눈을 뜬다. 더듬더듬 리모콘을 찾아 TV를 켠다. 밤새 일어났던 사건과 소식들의 영상이 눈과 귀를 자극한다. 출근길, 거리의 기호들을 따라 발길을 움직인다.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는 부유하는 시선을 신문이나 광고 글귀에 고정시킨다. 직장에 오자마자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하루 일과를 점검한다. 전화와 팩스의 불규칙한 울림에 손과 발이 장단을 맞춘다. 정오,‘가격파괴’와 ‘IMF메뉴’를 간판에 내건 식당을 찾아 식사를 한 후, 속이 환히 비치는 세련된 분위기의 커피전문점에서 거리의 행인을 바라보며 한잔의 커피를 마신다. 빌딩숲 한 귀퉁이의 ‘도심 속의 작은 축제’에서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가 무미건조한 오후의 도심공간을 촉촉히 적셔준다. 오후 6시, 지친 하루의 일상을 쇼핑과 여가 속에서 해소한다. 서점에 들러 활자미디어에 흠뻑 취해보든지, 극장이나 음악감상실을 찾아 무뎌진 감각을 자극해본다. 귀가길, 차창밖에는 전자식 전광판이 뉴스 속보와 화려한 상품광고를 내뿜으며 끊임없이 명멸한다. 늦은 밤, 다시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TV를 켠다. 거리에서 보았던 수많은 메시지와 이미지들이 또다시 화상으로 다가온다. 노트북을 켠다. 그리고 하루를 기록한다. “1998년 봄 어느날, 수많은 미디어로 넘실거리는 일상” 낯익은 하루의 일상이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은 ‘집→거리→직장→여가공간→집’이라는 순환망을 따라 공간적으로 이루어지고, 동시에 생활공간은 다양한 미디어를 매개로 일상적으로 재생산된다. 즉, 미디어는 물리적인 일상공간을 뒤덮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 공간에 대한 경험과 공간의 의미를 재현함과 동시에 새로운 의미의 공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공간 역시 하나의 미디어다

미디어란 무엇인가? “미디어는 상징적인 내용을 수용자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전문집단이 기술적인 도구로서 사용하는 모든 채널”이라는 야노비츠의 정의에서 보듯이, 미디어는 단순한 대중매체의 의미를 넘어선, 모든 ‘재현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미디어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소설, 사진, 그림, 영화, 광고, 음악, 일상언어, 지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의미가 창출되고 전달되는 다양한 기호로 충만한 특정 ‘공간’이나 ‘장소’ 역시 하나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가 일상생활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은 다양한 차원에서 파악된다. 먼저 ‘미디어의 공간적 중심성’을 들 수 있다. 미디어는 사적인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공공공간(urban open space)에서도 점차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장악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광고 논리이다. 시각이미지에 호소하는 광고의 욕망자극효과가 광고상품 자체에서, 상품을 전시하는 쇼윈도로, 상품이미지와 동일하게 만들어진 상가건물의 파사드로, 다시 쇼핑몰이나 대형백화점과 같은 하나의 쇼핑공간으로, 나아가 그러한 소비공간이 모여 형성되는 거리로 점차 확장되면서 도시의 중심 공간이 상품논리의 메시지를 담은 미디어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는 개인의 ‘공간적 이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령 거주지를 선택할 때 흔히 의지하는 것이 신문이나 생활정보지다. 미디어는 또한 ‘공간 경험’을 변화시키는 주요 기제로도 작용한다. 인공위성과 인터넷 등 뉴미디어의 발달로 세계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안방에서 동시간대에 TV화면으로 볼 수 있는 ‘시공간 압축’ 현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공간배치나 공간이동, 그리고 공간경험에 대한 미디어의 영향과 더불어 미디어가 일상생활공간의 공간적 실천에 끼치는 가장 커다란 영향은 바로 공간과 장소의 정체성, 즉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생활주변의 장소와 공간에 대한 인식은 개인의 일상생활을 규정지음과 동시에 새로운 일상창출의 중요한 계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미디어 지리학이 미디어를 통해 재현되는 장소의 성격과 장소에 대한 감성적 경험, 그리고 ‘장소의 이데올로기’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디어 속의 장소정체성

장소는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적 토대이다. 장소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하며 이를 통해 획득되는 장소의 친밀감과 정체성은,`자아에 대한 친밀감과 신뢰로 구성되는 자아정체성의 한 차원을 구성한다. 미디어는 이런 장소정체성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매체이다. 따라서 미디어를 통해 장소의 의미가 창출되고 경험되는 방식은 미디어의 지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연구주제다.

미디어를 통한 공간과 장소의 의미화 과정에 대한 탐색은 크게 활자미디어, 영상미디어, 음성미디어 그리고 뉴미디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활자미디어’는 신문, 잡지, 문학작품, 홍보용 팜플렛 등의 인쇄매체를 의미한다. 특히 신문과 잡지는 매일 우리가 접하는 미디어로, ‘지역’란과 ‘레저·관광’란, ‘지역광고’란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리정보와 공간담론들이 담겨져 있다. 또한 문학작품은 인간과 장소에 대한 사실적 자료의 수집, 작품 속에 나타나는 장소관, 공간체험의 다양한 특성 재현 등의 측면에서 문학지리학의 주요 연구소재가 되어왔다. <태백산맥>, <토지> 등의 역사소설에 나타난 민중의 역사적 삶에 대한 연구,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과 같은 시를 통한 서울의 시공간성의 변화 추적, ‘중심-주변’이라는 지리적 개념 등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영상미디어’의 경우, 특히 텔레비전은 뉴스와 광고,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장소정체성을 지배하고 사회적 통제기능을 수행하는 ‘의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광고는, 광고효과의 지리적 규모(범세계/국가/지역/지구), 공공공간의 사유화, 상품을 매개로 한 장소이미지 형성, 광고 의미와 해석의 지역적 차이 등의 차원에서 광고지리학의 주요 연구주제가 되고 있다. 영화는 장소와 공간의 성격과 이미지, 권력관계를 재현하는 대표적인 문화정치의 미디어 텍스트다. 국적없는 뉴욕의 다양성을 그린 <애니홀>, <비열한 거리>, 박제된 도시 파리의 출구없는 변두리의 분노를 표현한 <증오>, 서울의 꿈과 절망, 다중적인 정체성을 그린 <장미빛 인생>, <구로아리랑>, <나쁜 영화>, <악어> 등 영화는 수많은 지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림 속에 존재하는 경관 역시 당대의 역사적, 지리적 맥락을 반영하는 다양한 상징들을 지니고 있으며, 권력층의 의식세계를 반영하는 중요한 표상으로서 시각미디어 분석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음성미디어’는 라디오, 음악 등의 청각매체를 일컫는다. 음악은 일상생활공간의 물질적 배경을 제공해줌으로써 장소 형성에 영향 끼치고, 장소마다 고유한 청관(soundscape)을 조성시킨다. 아메리칸 컨츄리음악에 나타난 성스러운 혹은 세속적인 장소의 이미지, 랑이라는 가수의 음악이 레지비언 청취자들에게 소비되는 방식과 독특한 공간을 생산해내는 방식 등에 대한 연구사례가 있다.

마지막으로 ‘뉴미디어’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새롭게 대두된 미디어로, PC 통신과 인터넷 등의 사이버 공간이 대표적이다. 특히 각 도시들의 지역활성화 전략인 장소마케팅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도시홈페이지는 도시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새롭게 재현하는 주요 미디어로 주목되고 있다.
공간미디어를 통한 사회 읽기

다양한 의미들이 소통하고 교섭하는 공간 그 자체, 즉 ‘공간미디어’는 일상생활의 권력관계와 사회적 의미를 재현하는 일종의 기호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미디어를 통한 공간 읽기와 더불어 공간미디어를 통한 사회 읽기를 미디어 분석의 주제로 상정해 볼 수 있다. 공간 스펙터클을 이루고 있는 도시경관이나 축제 및 이벤트, 거리, 광장, 낙서 등이 주로 분석되는 공간미디어다.

기 드보르가 지적했듯이 스펙터클은 ‘이미지에 의해 중재된 사회적 관계’로, 그 시대의 지배적인 생산양식과 사회관계를 반영한다. 예컨대 서울의 경우, 6·70년대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는 대규모 고층빌딩군과 아파트단지 등의 ‘근대화 스펙터클’이 지배적이었다면, 80년대 후반 이후엔 24시간 편의점, 커피전문점, 다국적 패스트푸드점 등의 ‘포스트모던 상업스펙터클’이, 90년대엔 이러한 상업스펙터클이 정보통신기술과 결합된 ‘전자스펙터클’이 당대의 지배적 사회관계를 반영하는 공간미디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관은 단순히 물리적인 가시적 실체가 아니라, ‘공간의 시각적 전유방식(ways of seeing)’, 즉, ‘다양한 의미체계’를 지닌 공간의 존재양식을 말한다. 즉 경관은 일종의 텍스트다. 텍스트에는 작가가 있고 다양한 절차와 기술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 농축된 일련의 의미가 있고 독해형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듯이, 경관 역시 다양한 의미체계를 이루고 있고 그 의미의 생산과 소비과정이 존재하며 이면에 권력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경관의 상징과 의미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연구주제로 부각된다.

일상의 미디어적 실천을 위하여

일례로 거리축제는 사회정치적 통합의 장, 경제활성화의 수단, 갈등과 투쟁의 문화정치적 장이라는 다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미디어다. 예컨대, 강릉의 단오제, 경주 신라문화제, 수원 화홍문화제, 춘천 인형극제 등의 다양한 향토축제는 지역주민의 화합을 통해 지역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사회통합의 의미를 주로 담고 있다면, 이천 도자기축제, 수원 갈비축제, 청담미술제, 명동축제 등은 지역경제활성화의 의미가 보다 지배적이다. 반면에 ‘예향’으로서의 광주와 ‘저항의 도시’로서 광주라는 광주의 두 도시 이미지가 경합하고 갈등하는 광주비엔날레와 안티비엔날레, ‘소비공간’으로서 신촌과 ‘대학문화공간’으로서 신촌의 두 이미지가 경합하는 신촌문화축제와 새터민족문화제, 그리고 인권영화제 등은 문화정치적 장으로서의 의미를 보다 많이 담고 있다. 이 외에 경기도 성남 지역 주민들의 아픔과 갈등을 상징적으로 재현해주고 있는 성남 거리의 낙서들, 혹은 ‘동해’ 지명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나 지하철 역명을 둘러싼 갈등 등에서 보듯이 낙서와 거리명도 서로 다른 의미와 상징이 재현되고 있는 공간미디어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미디어는 다양한 의미의 창출과 재현의 과정을 통해 일상생활공간을 구축하고 변모시킨다. 따라서 미디어를 누가 지배하고 미디어를 통해 어떠한 의미를 소통시키느냐 하는 것은 일상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다. 다양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미디어의 창출, 사회적 약자가 소외되지 않는 민주적 미디어의 생성을 위한 일상의 미디어적 실천이 절실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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