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그러면 클린턴이 줄 것이다”

신진범/ 영문학 박사 4차



굶주림에 시달리는 흑인과 가장 부유한 나라의 대통령의 만남. 아프리카와 미국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웃는 얼굴로 만났다. 지난 3월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미국대통령으로서는 세번째로 클린턴이 방문했다. 1943년 12월 2차 대전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세네갈을 몇 시간 경유한 것을 시작으로, 카터 대통령이 20년전에 한번 방문한 것이 고작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번 순방에서 아프리카가 아직도 빈곤과 문맹,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매우 고심하고 있다면서 아프리카에 대한 개발원조를 현재 7억달러에서 8억3천만달러로 증액할 것임을 시사했다. 또한, 16억 달러에 달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대미부채의 탕감과, 미국과 아프리카와의 ‘상호존중과 보상에 기초한 진정한 동반자 관계의 구축’을 강조했다.

진정한 동반자 관계의 의미

이번 기간동안 클린턴은 남아공 반아파르트헤이트의 봉기현장인 소웨토를 방문해서 인종차별에 저항하다 숨진 흑인들의 묘역에 헌화했으며, 부인 힐러리와 함께 지난 76년 6월 반 아파르트헤이트 항쟁운동의 첫 희생자인 14살짜리 흑인 소년 헥토르 페터슨의 기념탑에서 나무를 심었다. 또한, 클린턴은 아프리카 국민들을 향해 ‘미국과 유럽은 노예무역의 열매를 취했다’면서, 우간다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미국이 과거 노예제도로부터 이익을 얻은 것은 잘못이었다고 시인했다. 이에 대해 한 언론은 역대 미국 대통령이 노예제도에 대해 말한 것 중에서 가장 사과에 가까운 것이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국이 노예제도를 사과해야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잡혀온 미국 흑인노예의 숫자는 1641년 2백50명, 1680년 7천명, 1710년 12만명, 1776년 50만명, 1820년 1백50만명에 달했다. 한편, 1785년 미국 헌법은 의원수를 정하기 위해 노예 1명을 0.6(3/5)명으로 계산했는데, 이것이 바로 5분의 3조항이다. 또한 1983년 루이지애나주에서는 수지 길로이 핍스라는 백인 여인에게 32분의 1이라는 흑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해서 그녀를 흑인으로 판결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정부는 1932년대 매독에 걸린 흑인들을 대상으로 잔인하고 인종차별적인 생체 실험을 실시한 적도 있다. 이에 대해 65년만인 지난해 살아남은 피해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서 대통령이 직접 사죄하였다. 이처럼 미국 흑인들이 그런 취급을 받은 것은 그들이 흑인이라는 이유외에는 없었다.

과거 노예 무역과 삼각무역이 확립되면서 특징이 별로 없고 유순하게 인식되던 아프리카인이 사악하고 미개한 종족으로 특성화되었다. 이와 같은 흑인에 대한 고착화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아프리카와 미국뿐만 아니라 흑인들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태도를 세계적으로 퍼뜨리는 결과를 낳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인과 흑인의 조우는 결국 ‘잘못된 만남’이었다. 월터 로드니(Walter Rodeny)는 그의 역저 <유럽은 아프리카를 얼마나 퇴보시켰는가>(How Europe Undeveloped Africa)에서, 아프리카의 문화와 문명이 정상적으로 성장, 발전하지 못한 원인이 4백년간의 백인 유럽의 침탈과 식민 지배에 있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많은 아프리카의 작가들은 식민통치에 의한 유럽문화의 일방적 유입과 강요로 인해 아프리카의 순수한 전통과 문화가 산산조각난 안타까움과 그 정신적 상흔(傷痕, trauma)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화

이번에 클린턴이 아프리카에서 한 연설을 두고 언론들은 미국내 흑인유권자들과 경제관계 확대를 노리는 아프리카 각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미국은 백인 소수정권이 흑인을 분리해 투표권을 거부하고 정치 활동을 규제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수십년간 지지하다 80년대 중반에서야 미국내 반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 굴복해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고 미기업인들을 철수시킨 바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미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방문과 교역을 위한 협정이21세기 세계경제력의 선점을 위한 치밀한 계획의 일부로, 아프리카를 ‘경제적, 문화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로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백악관은 이번 방문을 ‘아프리카의 발전과 평화정착을 위한 절박한 외교정책상의 문제’라는 그럴듯한 말로 설명하고 있지만, 방문 일정을 살펴보면 투자와 무역 촉진 등 미국의 경제이익에 편중되어 있고, 미국이 재정지원이나 부채탕감 조치 등 아프리카에 대한 공약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힘들다.

한편으로는 클린턴의 아프리카 순방이 미국내 3천4백만의 흑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빈곤, 기아, 질병 등의 부정적 이미지로만 알려진 아프리카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끌어올릴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극적이었던 미국이 신아프리카 정책을 선언하며, 인구 7억의 거대한 ‘검은 시장’ 아프리카에 대해 눈독을 들이며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와 패권을 다투고 있는 현실은 미국의 선의를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클린턴이 이번 순방 대상국으로 선정한 6개국도 미국의 수출 및 경제 이해 관계에 따라서 엄격히 선발되었다는 점과 아프리카에서 행한 노예제도의 사과에 가까운 발언이 세계 노예제도 폐지 1백5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또 다른 함의를 가진다.

클린턴은 하이에나인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보면 그 높은 산에 올라와 얼어죽은 표범과 죽은 고기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등장한다. 클린턴이 아프리카로 간 까닭을 원대한 이상을 찾아 킬리만자로에 오른 표범으로 볼 지 아니면 ‘시장개척, 천연자원, 값싼 노동력’ 등의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로 볼지는 역사를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며 아프리카 지성의 상징이었던 세네갈 전대통령 셍고르는 4세기에 걸친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침탈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하느님, 백인의 유럽을 용서하소서!/ 4세기에 걸쳐 백인의 유럽이/ 침흘리며 짖어 대는 사냥개들을/나의 땅에 풀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포는 서부 해안에서/ 동부의 지평선까지/ 대낮처럼 드넓은 나라의 허리를/ 관통했으며…”(<평화를 위한 기도>중에서)

아프리카인들이 열광적으로 클린턴을 환영하던 모습을 보면,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를 방문한 클린턴과 교황 둘 중에서 그들은 ‘빵’을 택한 것같다. 클린턴의 모습이 “구하라, 그러면 내가 주겠”노라던 예수의 모습으로 보인 것은, 그의 방문이 갖는 역설이다. 이제 후대의 시인들은 또 어떤 기도를 올리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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