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 / 미술평론가 dogstylist.com

잊혀질 법하면 유령처럼 나타나 세상을 들어다놓는 예술품 vs. 음란물 공방이 지난 7월을 기점으로 다시 불거졌다. 어느 시골 중학 교사 부부가 자신의 누드 사진을 홈페이지에 게재한 이유로 법정에까지 서야만 했던 대단히 대한민국적 해프닝, 세칭 김인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 사건은 5년여를 끈 법정 공방에서 결국 유죄판결로 결론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규탄하고 김인규씨를 지지하는 전시를 온·오프라인에서 기획한 사람으로서, 허용 가능한 예술의 기준과 예술품과 음란물에 대한 객관적 구분 정도는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 마땅해 보인다. 하지만 만인을 만족시키는 것이 예술의 책무도 아닌데다가, 해외의 사례 역시 지금은 걸작으로 상찬받는 작품들이 줄줄이 외설물로 간주한 선례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김인규씨를 포함 18명의 작가가 출품한 지난 달 전시의 제목은 <유죄교사 김인규와 죄없는 친구들>이었다. 김인규씨는 2000년도 촬영한 부부 누드로 05년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이유야 어쨌건 유죄가 맞다. 하지만 그에 동조한 17명 중 노출의 강도가 김인규를 능가하는 몇몇은 05년 현재 ‘아직까지’ 무죄다. 만일 사법당국이 본 전시를 사후 검문이라도 했다면, 그들의 처지도 김인규씨와 동일한 곤욕을 치렀을지는 알 수 없다. 단조롭기까지 한 부부 누드가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건이 된 데에는 허용 가능한 예술의 범위가 정밀한 노출 수위의 관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창작자가 자신의 신분(마광수나 김인규는 교직에 있는 사람이었다)에 맞게 처신하기를 원하는 기득권의 바람과 그것이 거역되었을 때 공권력이 느끼는 불안감이 표출된 것으로 이해해야 옳다.

몸에 관한 이항대립적 기준
한편 누드에 대한 해외의 평가는 어떨까. 긴 목의 여성 누드화로 유명한 모딜리아니 역시 비슷한 곤욕을 치룬 바 있다. 그의 1917년 파리 전시는 경찰에 의해 폐쇄되고 말았는데, 그림 속 여인들이 체모를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어 음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주의 화가로 구분되는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은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여성 모델의 상반신은 완전 누락된 채 오로지 화면 가득 체모로 무성한 여성의 벌린 다리 사이가 클로즈업 되어 있는 포르노그라피다. 이 작품은 1866년 제작 후 100년이 넘도록 일반 공개가 허용되질 않았지만, 지금은 미술관에서 ‘걸작’의 대우를 받으며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건 어찌된 일일까. 누드화가 하나의 미술사적 전통으로 자리 잡은 서양에서 누드의 재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관한 고민은 하나의 성장통 마냥 이론 정립의 형태로 구현되어왔다.
 정통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는 그의 대표적 저서 <누드>에서 어쩌면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궁금증, 즉 벗은 몸에 관한 이항대립적 기준과 허용가능한 예술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것 같다. 알몸(naked)과 누드(nude)에 대한 그의 이분법은 유명하다. 클라크에 따르면 알몸은 그림 속의 모델이 자신이 벗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누드는 그 사실에 ‘무관심한 것’이란다. 즉 알몸은 ‘무방비 상태로 움츠린’ 신체이고, 누드는 ‘균형 잘 잡히고 건강한’ 신체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구분을 통해 알몸에 대한 누드의 미학적 우위를 결론지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럴 듯 해 보이는 이 구분은 어쩐지 엉성하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선 칸트의 ‘무관심의 미학 (disinterested aesthetics)’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한 보수적이다.
반면 맑시스트 미술사가 존 버거는 “알몸은 그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클라크의 주장이 품고 있는 위선을 폭로했다. 공권력은 어째서 예술의 표현 범주를 한정하고 제어하려 드는 걸까. 그리고 사회구성원들은 공권력의 결정에 왜 쉽게 수긍하는 걸까. 국가가 예술의 표현에 수위를 매기고 관리하는 것에는 언제나 명분이 따르며, 그것은 대체적으로 대동소이한 논리에 입각해 있다. 즉 예술품의 재현(represent)이 대민정서와 미풍양속에 크게 저촉되고 성윤리를 위협하거나 폭력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되돌아보면 공권력이 개입하는 예술의 문제점은 대체적으로 성과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예술성 논란은 소모적
 예술은 ‘어떤 가시적 대상 혹은 불가시적 인상을 가시적/가상적 공간 안에 옮겨놓는 표현’ 일 것이다. 그 결과로 도출된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선동성이나, 가치 지향을 포함할 가능성을 품는 탓에 권력의 감시 대상이 될 운명에 놓인다. 즉 권력의 가치와 보조를 맞춘 예술품은 권장되지만, 권력 유지에 누가되는 것으로 ‘판단된’ 것들은 견제를 받게 된다. 후자의 경우가 바로 제도적 견지에서 ‘허용 불가능한 예술’일 것이다. 이로서 표현의 금기는 하나의 역사가 된다.
금기의 목록은 다음과 같이 세분화된다. 정치적으로 반정부적 이념을 표방하거나, 성(性)과 폭력을 노골적으로 재현하는 경우이다. 여기에 객관적 기준은 없다. 그때그때 다른 사법당국의 심기(心氣)가 기준이라면 기준이다. 성과 폭력의 표현이 유독 규제 대상으로 부각되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 현실 공간에서 성적 타락과 폭력을 유발해서라기보다는, 어느 조직에서건 수적으로 극소수 지배자가 대다수 피지배자를 관리 통솔하는 수단이 바로 폭력의 사용과 성의 배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과 폭력에 대한 중앙집권적 권한을 위협하는 ‘표현물’은 성/폭력의 독점권자의 처지에서 볼 때 마땅히 관리 대상으로 인식될 것이다. 관리 방법은 아주 단순하고 간편하다. 공동체 구성원에게 예술의 본질을 성과 폭력같은 유물론적 재현물의 정반대에 놓인 것, 즉 관념적 가치를 재현하는 것이라 교육하면 된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작품들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살펴보면 이는 쉽게 확인될 것이다. 문제의 작품에게 쏟아지는 뭇매는 대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바로 “그것이 예술적이지 못하다”는 질타이다. 작품의 예술성 논의는 결국 소모적인 논란에 빠지게 만든다. 그것이 예술적이라는 걸 무슨 수로 증명한단 말인가. 따라서 우리가 정작 힘을 쏟아야 하는 지점은 예술성 여부에 대한 한없는 증거이기 보다는, 공권력이 이런 사태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에 관한 정치적 폭로인지도 모른다. 권력 유지를 위해 희생양으로 내몰리는 표현물들이야말로 그것이 예술이건 아니건, 허용되고 보호받도록 우리는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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