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효경 / 월간 언니네 unninet.co.kr 편집팀

나는 비혼(非婚) 여성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未婚)이 아니라 앞으로 결혼하지 않을 비혼 여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독신자들의 비율이 꽤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혼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한때의 치기어린, 혹은 세상을 알지 못해하는 반항으로 읽히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어쨌든 나는 비혼을 지향한다. 나라는 사람의 성향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려할 때 도무지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 획득하는 아내라는 이름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혼의 길을 가겠다는 것은 쉬운 선택은 아니다. 이 ‘혼(婚) 권하는 사회’는 정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에 아주 가혹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모든 노동 모델과 사회에서 제공되는 혜택, 정부의 정책은 정상 가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신자 비율의 증가와 저출산 시대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담론의 기저에는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사실상 정상 4인 가족(이 글에서 특별히 언급되지 않을 경우 가족은 지금의 남녀의 혼인 및 혈연으로 이어지는 가족을 이야기한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계급적 구조이며 지금의 노동 구조는 여성이 돈을 받지 않고 행하는 가사 노동의 전제 하에 만들어져있다.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가족의 존재, 정확히는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여성 때문에 ‘생계담당자’로서의 남성 노동자에게 지금과 같은 노동 시간을 배분할 수 있다.

더욱이 비정규직이 늘어난 지금에서는 여성도 일을 가지는 것이 당연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사노동의 분담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밖에서는 임금노동자로, 안에서는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중의 부담을 더욱 심하게 지게 되었다.

그러나 가족의 문제점은 단순히 가족을 계급적 기구로 보고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 단위라는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없다. 미셀 바렛은 <가족은 반사회적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폐쇄적 집단의 문제점을 잘 진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정은 따뜻함의 공간이나 정서적 유대의 상징처럼 그려져 왔다. 때문에 가족이라는 결혼과 혈족으로 맺어진 집단은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로 여겨지고 그 외의 집단은 외부라고 경계 지어진다. 흔히 가정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 가장 유대가 깊은 1차적 집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한 가정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행위이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대부분 사적 영역의 것으로 한정지워지기 때문에 아내 구타나 아동 학대도 가족의 문제로 치부되어 외부에서 대처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한국의 가족은 보통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인 권력 체계를 가진 집단이므로 민주적인 의사소통 방식은 무시되기 십상이다.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자녀들과 자녀들에게 집착을 보이는 부모와 같은 기형적인 인간관계들은 유대감과 친밀함이라는 미명 하에 사생활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가족이란 경계의 폐쇄성

가족의 폐쇄성은 혈연, 혼인 중심의 가족에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다른 집단을 타자화하고 경계지어버린다. 동시에 가족 내부의 구성원들에게도 상당한 억압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홈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화목한 가족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정상 가족의 시나리오를 강요하고 있다. 대학에 들어와 여성주의를 접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집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나는 내 주위에 의외로 정상 가족이 많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홈드라마에 나오는 중산층의 화목한 가정을 가지지 못했던 나는 그것이 언제나 일종의 컴플렉스처럼 작용해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를 꺼려했었다. 원만하지 못한 부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고, 나 스스로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자신의 수치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사회가 얼마나 정상 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것들을 숨기고 은폐하려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나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은 어디를 가나 그것을 숨겨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학창 시절 내내 학기 초마다 배려 차원에서 눈을 감긴 채 시행되던 가족 조사와 한부모가정 혹은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아이를 이상하게 보던 아이들, 연일 신문 지상을 장식하는 범죄자들의 과거사를 들추며 제대로 되지 않은 가정환경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떠들어대는 언론은 이 사회가 신봉하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족의 형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이다.

앞서 나는 스스로를 비혼 여성이라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내가 비혼을 지향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비혼 여성으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이란 여성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상의 범주로 들어가 기득권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혜택이 주어진다. 사람들이 결혼을 택하고 가정을 이루는 이유는 혼자 산다는 것 자체의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주변의 시선과 사회 구조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이다. 혼자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군화를 문 앞에 두고 산다는 아는 언니의 말이 생각난다.

정상-비정상의 억압을 벗겨야

‘또 하나의 문화’에서 출판된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가족에 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정해놓고 그 경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가부장제의 억압은 애초부터 아무런 선택지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가 앞으로 살아야 할 누군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린다. 비단 이성애 중심의 부부로 맺어진 결혼과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 자식 관계를 넘어서서 다양한 가족들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가족의 문제를 위한 대안이 ‘선택’에만 초점 맞추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모두 원해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꾸리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정상 가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가족 형태에 관한 물음은 현상 그 자체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한 부모 자녀 가정에서부터 독신자 가정(1인 가정), 동성커플 가정 등 다양한 가족의 출현은 전반적인 사회적 흐름이며 사회적 구조나 현실의 문제로 인해 가족의 형태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 중에서 이것이 해답이라거나 이런 모습이 대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떤 형태가 가장 민주적이며 이상적이라고 단정지어 버린다면 그 특수한 상황들이 처한 어려움을 간과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섣불리 각자가 원하는 가족의 형태를 선택하자고 말할 수도 없다. 예를 들자면 한국 사회에서 비혼 여성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제력과 이를 지지하고 도와줄 사회적 관계가 뒷받침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4인 ‘정상’ 가족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 역시도 대안은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개개인에게 주어진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갗에 관한 선택권은 존중되어야 하며 제도적, 사회적 차원에서 그 선택지를 넓혀가야 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다양한 삶의 형태를 정상과 비정상의 잣대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그간 당연하게 주어졌던 수직적, 가부장적인 가족의 모습 및 권력을 해체하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정상의 영역에만 머무르던 가족이란 수식어는 이제 조금씩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없애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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