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영 / 한국외대 강사

“우리는 오이디푸스를 박살낼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제는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컸다.”

들뢰즈가 <안티-오이디푸스>를 쓰고 68에 대한 반동을 겪은 후에 내뱉은 말이다. 우리는 들뢰즈를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분법을 박살낼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제는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컸다.” 경계와 탈경계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이분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탈경계와 차이를 연관짓는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들뢰즈가 ‘차이 그 자체’를 개념화하면서 꾸었던 꿈은 “동일자와 차이를 박살내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다지도 큰 꿈이었던가.
10년 전에는 <노마드>가, 그 이후로는 <차이>와 <타자>가, 어떤 때에는 <사건>과 <의미>가 유행했다. <노마드>는 유비쿼터스로 상업화되고, 정처 없이 사는 삶의 양식인 것처럼 세속화되었으며, <차이>는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자는 정치적 모토로 변질되었다. 이 유행의 힘은 지금도 여전히 강하고, 이 숱한 유행과 상품과 논란의 한 가운데에 들뢰즈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들뢰즈가 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적 상품으로서의 ‘경계’

이를테면 소수 문학이나 차이의 정치라는 개념도 들뢰즈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는 개념들이다. 들뢰즈가 이런 개념을 개념화할 때 실제로 소외된 소수자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n개의 성을 이야기 하며, 보편으로 잡히지 않는 ‘차이’를 말할 때 그것은 보편의 근거로서의 ‘차이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또 다른 소수적 ‘정체성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다수’에 대한 ‘소수들’을 이렇듯 다시금 하나의 ‘여성’, 하나의 ‘인종’, 하나의 ‘계급‘으로 동일화하여 이해한다면, 그리하여 이들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을 소수 운동이자 차이의 정치라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진정으로 심각한 들뢰즈에 대한 곡해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들뢰즈에 대한 곡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에 근거해 오히려 들뢰즈를 공격한다. 즉 들뢰즈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정체성(identit?이든, 어떠한 정체(r럊ime)든 허구이며 억압이라서 새로운 체계(syst뢭e)의 모색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박하기 어려우나 오히려 이러한 비판이 들뢰즈의 철학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들뢰즈를 폐기하는 것인가. 혹은 이것이 들뢰즈의 한계이자 약점인가.

우리는 오히려 들뢰즈를 온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그의 철학이 실재로는 전적인 정치철학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그 정치적 쓰임새를 제대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들뢰즈가 전개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존재론이다. 그의 존재론이 펼쳐지는 시간은 연대기적 시간(temps chronologique)이 아니라 영원의 시간(Aion)이다. 이 시간은 연대기적인 시간인 현재가 연장되어 가 닿는 어디엔가 있는 시간이 아니라, 현재와 공존하며 현재가 포함하고 있는 시간이다. “[니체의, 즉 들뢰즈의] 비시간적인 것(imtempestif)은 정치-역사적인 요소로 절대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종 어떤 중요한 순간에 이 두 시간은 일치한다. 인도에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갈 때, 이 재난은 역사-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해방을 위해 싸울 때, 여기에는 언제나 시적인 행위와 역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사건이 일치한다.”

차이라는 존재는 정체성을 가진 것들이 현재라는 시간을 살 때, 그것과 함께, 그것의 바탕으로서 아이온이라는 시간에 존재한다. 아이온의 시간에 존속하는(subsister) 차이, 의미, 욕망은 스스로 무한히 자유로이 생산하나 그 무한한 생산은 현재라는 시간과 의식이라는 기제에 의해 파악되고 표상되고 갇힐 뿐이다. 현재라는 시간을 바탕으로 전개되어야하는 정치-역사적인 사유는 그러므로 운명적으로 이 미학적인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시간을 현재로만 본다면 그 시간은 어딘가로 흘러가야할 것 같다. 그래서 목적론적이다. 하지만 현재를 기초 짓고 있는 차이의 시간은 현재와 함께 있다. 그래서 목적이 없다. 오로지 차이와 의미와 욕망이 자유로이 생산되는 것만이 선이라고 할까. 

이분법 해소와 차이의 반복

들뢰즈의 존재론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어떤 순간에 정치적인 담론과 일치할 수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분법 아래에 또는 위에 존재하는 이 들뢰즈의 차이를 이분법의 한켠으로, 다시 말해 동일자의 반대편으로 놓고 끈질기게 오해해왔다. 이분법을 박살낸 들뢰즈를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들뢰즈는 들뢰즈가 아니라 헤겔이다.

들뢰즈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헤겔을 끌어들인 것이 다소 충격적인가. 그것이 충격적이라면 그만큼 우리가 들뢰즈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사적으로 존재는 언제나 운동과 정지의 긴장 관계 속에서 다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가 정지로서의 존재만을 다룬 이후, 베르그송이 지속을, 헤겔이 변증법을, 그 밖에 여러 철학자들이 정지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존재를 부각시켜왔다. 헤겔은 정지된 존재와 그 논리가 운동을 포함하지 못하므로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운동을 정지에 복속시키고자 했다. 그는 하나를 세우고 다른 하나를 더하는 방식으로 복수성으로, 궁극적인 목적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다름 아닌 동일자와 타자가 발생한다. 동일자는 타자를 소화하고, 소화된 이 존재는 다시 동일자가 된다.

이 동일자는 다시 타자를 소화하며, 이렇게 해서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포용의 논리인가. 아니다. 이것은 배제의 논리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타자를 생산한다. 유럽연합이 아무리 타자들을 계속 수용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매 순간 그것 아닌 존재를 타자로 재규정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차이나 타자는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유행처럼 혹은 관용을 베풀 듯이 <차이를 인정하자>고 할 때의 이 차이는 굳이 들뢰즈 철학이 나오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헤겔에게서 이미 발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들뢰즈를 이렇듯 헤겔로 오해해왔다. 이에 우리는 심각하게 물어야한다.

들뢰즈와 헤겔이 어떻게 다른가.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들뢰즈 본인이 <차이와 반복> 서문에서 선언하듯 <반-헤겔주의>를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이 차이는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 분명히 할 것은  통속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차이는 헤겔의 차이이다. 그리고 들뢰즈의 차이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조금의 미련도 없이 이 이분법을 박살내야 한다. 들뢰즈의 차이는 언제나 보편에 잡히지 않는, 언제나 동일성을 빠져나가는, 그러면서도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심연이다. 들뢰즈가 다루는 것이 이렇듯 존재의 심연이라는 것, 그것은 연대기적 시간에 스스로를 내보이지는 않지만 존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비로소 <차이>를, 그때에야 비로소 <차이의 정치>를, 새로이,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차이의 정치>는 아직 그 논의가 시작되지도 않았다.

우리는 들뢰즈의 존재론이 정치철학으로 적용되기 어려운 것이 그 철학의 한계이자 약점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이렇게 답해야한다. 이것은 들뢰즈의 한계이자 약점이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의 한계,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는 정치와 역사의 약점이자 한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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