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유행하는 포토몽타주, 혹은 미술에서 꼴라주와 함께 자주 들을 수 있는 ‘몽타주’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조립하는 것’, ‘짜맞추기’를 의미한다. 문학에 있어서는 출처가 다른 여러 텍스트들을 발췌, 조립하는 기법과 그러한 방법으로 생겨난 텍스트를 지칭하며, 희곡작품이나 방송극 등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문학에서의 몽타주는 특히, 다다이즘 작가들이 이질적인 재료를 가지고 미학적 도발과 충격을 일으키는 데에서 나타났다. 독일의 브레히트 또한 그의 서사극에서 대비를 통해 비판을 이끌어내는 기법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몽타주이론이 핵심이 되는 분야는 영화의 편집이다. 따로 떨어져 촬영된 쇼트들의 결합을 통해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영화적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오락성을 띤 극영화들은 관객이 영화 줄거리에 빠져들기 쉽도록 쇼트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헐리우드의 몽타주는 “장면이 바뀌기 전까지는 (곧 한 씬 안에서는) 쇼트와 쇼트가 연결되었다는 것을 관객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 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관객들이 만들어진 영화의 공간을 잊고, 최대한 그 속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편, 에이젠슈타인을 중심으로 한 소련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편집방식을 비판하며 대중의 의식을 깨울 수 있는 ‘지적 몽타주’를 내세운다. 쇼트 사이의 연결대신 충돌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그것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의미를 관객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영화매체의 목적 또한 그것에 있다고 말한다.
 
  벤야민은 영화 매체를 설명할 때, 에이젠슈타인과 같은 그러한 측면에서 그 긍정성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의 글쓰기에 있어서도 변화무쌍하면서 불연속적인 몽타주적 방식으로 시대의 흐름을 포착했다. 영화에서의 카메라의 시점변화와 몽타주 기법은 우리의 육체적 눈과 귀를 넘어서, 지각방식과 사유방식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커다란 충격은 영화 밖의 대도시 현실에서도 일상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변화, 충돌이 계속되는 우리의 삶에서 현재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미디어의 변화일 것이다. 문자, 영화, 컴퓨터를 통한 사유와 지각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옭아매는 족쇄들은 끊임없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충돌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몽타주는 새롭게 도래하는 미디어 시대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깨어있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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