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다양성과 획일성의 충돌

“백 만 명의 사람에게는 백 만 개의 양심이 있다” 병역거부운동 초기에 많이 외쳐진 구호다. 각각의 개인들은 살아온 배경, 성격의 차이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평화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여서 모든 사람이 평화는 총칼로 지키고 군대가 있어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병역거부의 문제는 군대에 대한 획일적인 사고와 충돌하는 다양성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병역거부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은 이런 획일적 사고와 충돌한다. 모두가 이성애자라고 믿는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에게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의 유무를 물어보게 된다.

유독 집단주의나 단결주의가 강한 한국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어떤 규격화된 틀을 직간접적으로 강요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같은 형태의 스포츠머리를 강요당하고, 모두 똑같은 교복을 입어야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동안의 자유 아닌 자유를 대학에서 누린 후, 군대에서 군복을, 회사에 취직해서 비슷한 모양의 정장을 입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패션에만 그치지 않는다. 고등교육인 대학교육까지 마친 우리들은 모두 다른 학과를 졸업했음에도 비슷한 특기-영어와 컴퓨터-를 가지고 비슷한 직종-공무원처럼 안정적인-을 선택하고자 한다.

단지 한국경제의 위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비슷해질까. 심지어 우리는 좋아하는 스포츠도 싫어하는 나라도 같아야 한다. 탁구를 좋아할 수도 있을 텐데, 월드컵 때는 모두 축구에 열광해야 하고, 이치로와 박찬호가 맞대결을 한다면 모두가 박찬호를 응원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모습의 ‘국민’이 되어야 한다.

똑같은 ‘국민’을 찍어내는 국가

어느 사회나 획일적인 구조와 그에 충돌하는 다양한 개인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의 독특한 상황은 획일화를 강요하는 주체의 문제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획일화를 강요하는 것은 항상 거대한 집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국가다.

비판적인 이성을 기르기보다 집단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압하는 우리의 교육은 한국의 모든 개인들을 같은 모습의 ‘국민’으로 찍어낸다. 예전처럼 무식하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물론 아무리 거대한 국가나 집단이 획일화를 강요한다고 해도 인간이라는 생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가지런한 논에서 삐져나오는 잡초들을 아무리 자른다고 끝내 절멸할 수 없듯이, 획일화된 사고를 강요할수록 그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결혼을 왜 안하는지 묻기 전에 결혼을 왜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모두가 총을 들어야 하는 사회에서 내가 왜 총을 들어야 할까 반문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당신들이 틀렸다고 말한 코페르니쿠스처럼.

민주주의 근간인 다양성 인정해야

문제는 충돌하는 것들의 질과 권력이 너무도 다르다는데 있다. 막대한 권력을 가진 국가 혹은 집단이, 자신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개인과 충돌할 때 어떻게 대체하는가. 국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질서에 다른 정체성을 가지려고 하는 개인들을 탄압하게 된다. 때로는 법과 제도와 공권력을 동원해서 개인들을 획일화의 올가미에 집어넣으려 한다.

군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병역거부자들을 잡아들이며,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동성애자들은 정신병자로 취급하면서 군대를 면제시켜 준다. 또 한 편으로는 좀더 완화된 형태로, 하지만 더 일상적인 영역에서 우리의 삶을 통제하려 한다.

결혼적령기를 넘긴 사람은 주위사람들로부터 언제 결혼하냐는 질문공세에 시달려야하며, 여름에 덥다고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은 동료들의 키득거림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인정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말은 할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세상은 끔찍한 지옥일 것이고, 인간이라는 복잡한 족속이 모두 같은 취향과 문화를 가진다는 것은 절대 가능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요원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고자하는 음모가 계속되며, 실제 우리는 음모에 꽤 많은 부분 말려들었다.

각 개인들이 스스로를 찾아갈 때, 획일주의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충돌은 결국 획일주의의 패배이며 다양성의 승리로 가는 방법이다. 이제 당연시되는 것들에 ‘왜’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획일화된 사회와의 충돌을 준비할 때이다.

이 글을 쓴 이용석씨는 '전쟁없는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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