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 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적경제학과 박사수료

본 지면은 교내·외 대학원생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소통의 장’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됐다. 이번호에서는 뒤늦게 공부의 기쁨을 깨닫고, 생각지 못한 취업을 하면서 얻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배움에는 늦음도 없고, 절실한 공부는 몸에 단단히 새겨진다. 〈편집자 주>

 

어느 만학도 이야기


김영희 / 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적경제학과 박사수료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들려줄만한 것인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알기에 내놓기 부끄러운 이야기인 것 같다. 그래도 뒤늦은 공부의 기쁨을 만끽한 일과 학업을 마친 이후 생각지도 못한 취업의 길을 걷게 된 어느 만학도의 수줍은 고백으로 생각하고 읽어주셨으면 한다.

  나는 95학번으로 의류학을 전공했다. 전공이 적성에는 잘 맞았지만 졸업 후 취업할 곳이 없어 전전긍긍했다. 학창 시절 수학을 좋아했기에 수학교습소를 차려 초등학생들을 가르쳤고,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들이 성장하는 만큼 나의 경력도 쌓여 중학생도 가르치게 되었다. 그렇게 십 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2010년 개인적으로 큰 아픔이 있었고, 더는 같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남편이 혼자 하는 학원 일을 도우면서 딸아이를 키우고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면서 살았다. 다니는 성당에서 성실하게 봉사하면서,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준 일이 사실은 나 자신의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이란걸 알게 됐다. 비쩍 마르고 구부정하고 표정까지 어두웠던 나를 위해 그들은 오히려 기도해 주었고 따뜻하게 안아줬다. 자연스럽게 사회복지에 관심이 생겼고, 온라인으로 자격증을 취득할 수도 있었지만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2015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하게 됐다. 만학도가 된 것이다.

  20살에 다녔던 대학을 40살에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학기 초에는 나를 교수님으로 알고 인사하는 학생도 있었고, 나 같은 만학도를 보면 엄마 생각난다며 챙겨주는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방인이었고 내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공부를 하니 두렵기도 했다. 걱정과 달리 강의를 들으면서 과제와 시험을 준비하며 공부를 하니 오히려 몇 가지 요령도 생겼다. 암기과목은 플래시 카드를 만들어 틈틈이 봤고, 토니 부잔의 《마인드맵》 책을 보고 새로운 필기법도 익혔다. 전공서의 목차와 내용을 그림과 도형, 색연필 등을 사용하여 한 페이지에 담았고, 이미지를 외우는 식으로 공부했다. 어떤 과목은 녹음을 해서 중요한 부분만 모아 4시간짜리로 만들어 등하교 시간에 운전하면서 들었다.

  그렇게 서서히 적응할 무렵, 고질적인 문제가 재발했다. 그동안 구부정했던 자세가 문제가 된 것이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등과 목이 너무 아팠다. 작심하고 수업 시간에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다리 사이에 필통을 끼우고 힘을 주어 앉았다. 집에 돌아오면 등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고 한 달 동안 몸살을 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몸속에서 ‘뚝’ 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구부정한 등이 펴졌다. 생애 전환기가 된 기적의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이후 의자에 12시간씩 앉아 있어도 아프지 않았다. 긴 시간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결과도 좋았다. 첫 학기 성적은 2등, 두 번째 학기에는 1등, 세 번째 학기에는 2등을 하면서 사회복지학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됐다.

  내친김에 대학원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남편에게 상의를 하니 남편은 맞벌이를 원했고 내가 다시 교습소를 하기를 원했다. 고민을 하다가 남편을 설득했다. 부부가 같은 직업군이면 비슷한 위기에 둘 다 어려울 수 있으니, 내가 월급쟁이를 하면 좋겠고, 내 나이가 많아서 석사를 따야 중간 관리자라도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몇 년 뒤 코로나19로 많은 자영업자가 고통을 겪었을 때 남편은 학원을 4개월간 셧다운 해야 했다. 그때 나는 월급이 나왔고 다행히 그 돈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어서 남편에게 같은 직업의 길을 가지 말자고 막연하게 했던 말이 이렇게 도움이 될지 몰랐다.

  고민 끝에 남편은 나의 대학원 진학에 동의했고, 가까스로 동 대학 사회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지도교수는 이정옥 선생님으로 여성 사회학자로 명망이 높으신 분이었다. 사회학은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프레임을 갖는 학문이기에, 수많은 학자의 이론을 공부하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갖는 훈련을 많이 했다. 유물론과 자본주의,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다원주의 등 학문의 근본을 따라가며 공부했다. 세미나식 수업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동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교수님들의 수업 통해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기분도 느끼며, 2년간 사회과학연구소에서 학비감면 조교를 했다. 논총집을 발간하는 업무를 봤고, 엄격한 학교행정 업무도 살짝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원의 꽃, 논문을 쓰는 시기가 찾아왔다. 정말이지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남의 생각을 요약하는 것이 아닌 내 생각을 길게 써 내려가는 것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교수님들의 독려와 반드시 쓰겠다는 내적 동기를 쥐어 짜내어 결국 논문을 쓰고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논문 쓰는 과정은 ‘욕조에 몸을 푹 담그는 것’과 비슷하다. 물이 식어버리면 몸도 식어버려 다시 뜨거운 물을 받고 시작해야 되는 것처럼 논문도 푹 빠져야 해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졸업을 해내니 이제 취업이 걱정됐다. 만학도로 대학원까지 간 나의 사정을 아는 분들에게 졸업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한 분이 ‘대구경북연구원이 큰데 거기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말해주셨다. 대구경북연구원은 지방자치단체출연 연구원으로 연구직 70명, 행정직 30명의 규모가 큰 연구원이었다. 누리집의 ‘상시인력지원’ 코너에 반신반의로 이력서를 올려뒀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면접을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며칠 후에 합격 소식을 듣고 ‘대구시민원탁회의’ 사무국 운영을 맡게 됐다. 300인 이상의 대규모 시민 토론회를 개최하여 여론을 수렴하는 업무인데 다양한 연령층을 상대하기에 나처럼 사회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적합하다고 여긴 것 같다. 일도 잘 맞아서 4년간 이곳에서 사무국 직원으로 일했고 보고서 작성, 토론회 개최, 사업계획서 작성, 연구용역 제안서 평가회 등 많은 일을 해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2022년 10월 대구시민원탁회의가 없어지면서 연구원 내 다른 업무에 투입되면서부터는 프로젝트 단위로 업무를 수행하게 됐다.

  한편 석사를 마치고 졸업 2년 후에 동 대학 사회적경제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됐다. 이때는 직장을 다니면서 수업을 들었는데, 직장과 학교의 거리가 멀어 체력적 부담이 컸다. 다행히 직장이 연구하는 기관이라 업무를 보면서 대학원 공부가 가능한 곳이었고 대학원 공부가 연구원의 역량을 높이는 일이기에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박사 수료까지 하게 됐고 이직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그러다가 박사 수업 때 법학과 이동수 교수님이 ‘정책지원관’이 신생 직업으로 생겨났으니 지원해 보라는 말씀을 해주신 것이 기억났다. 재작년에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지방의회 의원 정수의 2분의 1 범위에서 정책지원관을 둘 수 있게 됐는데, 이 말이 가슴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문득 생각났다. 때마침 공공기관 근무경력 3년 이상이라는 조건도 맞아떨어진 것을 확인한 나는 수성구의회 정책지원관을 뽑는 임기제공무원 경력경쟁 채용에 도전했고 지금은 나의 직장이 됐다.

  이것이 나의 이야기이다. 돌이켜보면 2015년 편입부터 지금까지 10년의 세월이 지났고, 만학도로 공부를 시작하며 지금은 전혀 다른 직업까지 갖게 됐다. 처음 말한 나에게 닥친 개인적인 아픔은 2010년에 아들을 의료사고로 잃은 일이다. 그리고 나의 석사논문은 아들의 의료사고를 사례로 다룬 『환자 운동을 통한 환자안전법(종현이법) 제정 과정 연구』이다. 아픔도 큰 에너지로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는데 나의 경우 그 에너지를 공부하는데 쏟은 것 같다. 참 다행이다. 사회문제를 이해하는데 공부가 많은 도움이 됐고 내가 세상을 향해서 하고 싶은 말도 논문으로 쓸 수 있었다. 고통은 죽을 만큼 힘들지만 다른 길로 들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며 돌이켜 생각해 본다. 내가 공부를 시작했기에 지금의 이 자리에 있게 됐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어떠한 삶을 살았든 나는 내 선택이 바르게 가기 위해 애썼을 것이고 지금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삶은 선택이 아니라 자세이기 때문이다. 지금 어딘가에서 힘들어하는 분이 있다면 감히 나의 경험으로 응원하고 싶다. 지금까지 당신은 너무 잘해 왔고, 당신의 앞날은 여전히 밝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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