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우 / 대구가톨릭대 AI 빅데이터공학과 석사

본 지면은 교내·외 대학원생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소통의 장’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됐다. 이번 호에서는 아프리카, 유럽, 남미를 다니며 깨달았던 것들과 여행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우리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될 수도 있고, 어떤 일의 원동력을 얻을 수도 있다. 〈편집자 주〉

 

내 삶을 바꾼 여행

 

박건우 / 대구가톨릭대 AI 빅데이터공학과 석사

 

  1996년 가을, 나는 울산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첫 손주인 나에게 잘 살라는 마음을 담아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자 했고, 유명하다는 철학관을 방문했다. 이름을 받아오며 간단하게 불러준 사주의 역마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십수 년 만에 이렇게 발현되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아서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부모님도 그런 나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셨다. 어쩌면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흥미를 가지고 밤늦게까지 학원에 남아서 노는 나를, 동생과 밖에 나가서 노는 걸 좋아하는 나를 오히려 반겼을지도 모르겠다.

비행소년

  그렇게 ‘하고잡이’라는 별명을 만들어 내며 커가던 어느 날,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경주 여행을 가기로 모의했다. 사실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요즘과 달리 스마트폰이 활성화가 되기 이전이라 정보를 쉽게 찾기도 어려웠고, 고작 15살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외박 허락은 넘기 힘든 산과 같았다. 부모님이 쉽게 허락해 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피피티까지 만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너무 쉽게 허락을 받았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가서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모텔과 찜질방은 미성년자 숙박이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출발 전 끈질기게 인터넷 검색을 했고, 그러다 찾은 게스트하우스에 허락을 구한 뒤 숙박을 했다. 거기서 만난 형과 누나들이 지금의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어린, 그저 대학생이었는데 그날의 나에겐 그들이 누구보다 어른 같고 멋있어 보였다. 형과 누나들은 그 당시 한창 유행이던 ‘내일로’ 여행을 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내일로? 그래 이거야!’하는 생각을 했다.

여행에 미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났고, 그 친구들과 내일로 여행을 계획했다. 17살의 우리는 정말로 겁이 없었던 것인지, 고작 배낭 하나만을 메고 전국 일주를 떠났다.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을 찍고 충청도, 전라도를 무궁화호를 타고 일주하는 시간들이 정말 꿈만 같았다. ‘이게 진짜 여행이라는 거구나!’ 항상 가족들과 함께 어른들이 짜준 일정대로 다니던 여행과 달리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여행은 정말이지 자유 그 자체였다. 한창 반항을 즐기던 어린 학생이었기에, 어른들의 간섭이 없는 여행을 더욱 흥미로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일주일 간의 여행을 마쳤다. 당시 페이스북 그룹 ‘여행에 미치다’가 한창 떠오르는 시기였는데, 그룹에 글을 올리는 많은 여행자를 보며 우리의 여행기를 여행에 미치다 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이후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이때부터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공부와 여행을 동시에 할 수는 없을까

  대학에 진학해야 할 시기가 오면서 여행을 잠시 내려놓게 됐다. 그러면서 ‘여행이 곧 일인 직업을 가지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 이후 꾸준하게 특수교사의 꿈을 가졌던 나였다. 그러나 당시 여기저기 세계여행을 다녀온 사진을 보여주던 지리 선생님을 보며 지리 교사로 장래 희망을 바꿔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리 선생님의 끈질긴 반대가 있었고, 석사 과정을 마친 현재에도 결국 지리 선생님이 되지 못했지만 나는 내 선택에 전혀 후회가 없다.

  그렇게 나는 지리교육과에 진학하게 됐다. 비슷한 친구들, 교수님들과 함께 방학마다 때론 학기 중에도 여러 곳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나의 첫 여행지이자 답사지는 아프리카였다. 다양한 해양 지형, 사막 지형을 공부하기도 하고 여러 기관들을 다니며 아프리카의 문화, 역사를 들으며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알게 됐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중점으로 한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의 역사에 대해서는 크게 다루지 않는데 아프리카에 직접 와서 보니 ‘내가 알던 아프리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나라가 많음을 깨달았다. 욕심 많은 나는 1학년을 마치자마자 역사교육을 복수전공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답사를 핑계로 한 출국이 더욱 잦아졌다.

팬데믹 그리고 우울한 3년

  아프리카에 이어 유럽, 남미를 차례대로 다니며 여행 전도사가 된 나는 여러 도시를 유랑하듯 여행하며 내가 꿈꾸던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공부도 같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끊임없는 원동력이 되곤 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던 어느 날, 모든 방송사에서 코로나19 대유행을 보도하기 시작하고 공포 분위기는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는 최종 여행지였던 브라질로 넘어가지 못하고 결국 귀국하게 됐고 그날부터 올해가 되기 전까지 딱 3년 동안, 그 어느 곳도 여행하지 못했다.

  참 우울한 3년이었다. 여행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학교에도 가지 못했고 3년을 다녔던 카페 아르바이트도 영업 제한으로 인해 그만둬야 했다. 집에 있으면서 커피믹스 달고나를 만들고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고 예쁜 잠옷을 사보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나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무기력한 삶을 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학위나 연구가 목적이 아닌,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

  학부생과 다르게 대학원생은 조교업무를 하거나 교수님을 뵙거나, 연구실에 출근해서 일을 한다. 어딘가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대학원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환경이었다. 남들은 대학생이 죄를 지으면 가는 곳이 대학원이라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부량과 업무를 자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혹사당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다른 잡생각을 안 하게 한다는 점에서 대학원은 나에게 코로나 3년 중 가장 잘 택한 선택지였다.

  사실 뚜렷한 목표 의식 없이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방향성을 잡아가는데 참 많은 방황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을 배워간다는 게 여행과 참 많이 닮아있어서 대학원에서의 생활은 여행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 좋은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다시 시작한 2023

  올해 1월, 오랜만의 가족여행으로 할머니를 포함한 19명의 식구가 다 같이 싱가포르로 떠났다. 혼자 하는 여행과 달리 18명을 인솔하는 여행은 참 쉽지 않았는데 가족과 함께여서인지 아니면 3년 만의 여행이어서인지 참 즐겁고 새로운 여행이었다. 이날 떠난 여행을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9개국을 더 여행했고, 그사이 논문심사에 통과해 졸업도 무사히 마쳤다. 참 오래 돌아왔지만 2023년은 나에게 정말 뜻깊은 한해이기도 했다. 다시금 여행을 하게 해준, 척척석사가 된 해이기도 하고, 이 모든 걸 해내면서도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게 해준 정말로 감사한 한해가 아닐지 싶다.

  글을 쓰며 많은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너무 주절주절 글을 써 내려갔는데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분들도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언제든 하고 싶은 걸 시도해보고 여러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내가 여행 찬양론자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여행을 통해 많은 멋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대학을 진학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원동력이었으며, 공부라고는 흥미가 없던 나에게 석사학위를 안겨주기도 한 정말 감사한 존재이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도 세계 구석구석을 떠돌며 또 다른 나를 만나고 또 새로운 공부를 해나가며 살아가고 싶다. 또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 내가 주인공인 멋진 삶을 살길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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