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 / 노무법인 돌꽃 대표 노무사

[방송은 노동자가 만든다]

우리나라가 콘텐츠 강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이를 제작하는 방송노동자도 주목받고 있다. 스타 PD·작가들이 배출되고 있는 반면, 부당함에 시달리는 방송노동자들도 존재한다. 이에 방송노동환경과 방송노동자들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봄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방송노동업계를 들여다보며 이를 통해 그들의 부당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현실 속 방송노동자 ② 방송사의 부당한 계약 ③ 방송사가 나아가야 할 길 ④ 방송노동자에게 필요한 법

 

일하고 월급 받으면 당연히 노동자일까

 

김유경 / 노무법인 돌꽃 대표 노무사

 

  누군가가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회사가 아닌 타인이 차린 회사에서 그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면 그는 노동자(Worker)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인정되려면 법과 법원이 마련한 매우 까다로운 기준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특히 방송 프로그램 제작 현장에는 무늬만 프리랜서로 위장된 무수한 이들이 법의 사각지대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제2조 제1항 제1호에서는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 비춰보면 일하는 사람 누구나 노동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법원이 ‘사용종속성’이라는 요건을 보탰다. 쉽게 말해 회사의 사장(사용자)에게 얼마나 인적·경제적으로 종속돼 일하는지에 따라 근로자의 여부를 따진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인지, 독립사업자인 프리랜서인지를 가려내는 판단 기준을 아래 판결에서 제시했다.
  재작년 11월 11일 선고됐던 대법원의 ‘2019다221352’ 판결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는 계약의 형식이 고용계약, 도급계약 또는 위임계약인지 여부보다 근로제공 관계의 실질이 근로제공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종속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업무 내용을 사용자가 정하고 취업규칙 또는 복무(인사)규정 등의 적용을 받으며 업무수행과정에서 사용자가 상당한 지휘·감독을 하는지, 사용자가 근무시간과 근무장소를 지정하고 근로자가 이에 구속을 받는지, 노무제공자가 스스로 비품·원자재나 작업도구 등을 소유하거나 제3자를 고용하여 업무를 대행하게 하는 등 독립하여 자신의 계산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지, 노무제공을 통한 이윤 창출과 손실 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는지와 보수의 성격이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인지,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하여졌는지 및 근로소득세의 원천징수 여부 등 보수에 관한 사항, 근로제공관계의 계속성과 사용자에 대한 전속성의 유무와 정도,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법령에서 근로자로서 지위를 인정받는지 등의 경제적·사회적 여러 조건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위 대법원 판결문에 제시된 요건 중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는 ‘업무 내용을 사용자가 정하는지에 대한 여부’와 ‘업무 수행 과정에서 사용자가 상당한 지휘 및 감독을 하는지의 여부’다. 쉽게 풀이하면 노동자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어도 실제로는 회사가 미리 업무 수행 방식, 순서, 내용 등을 정해놓아 노동자가 이를 시키는 대로 수행했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본다는 의미다. 

방송노동자들을 ‘무늬만 프리랜서’로 위장하는 방송국

대법원은 오래전부터 계약의 형식이 아니라 실제 일한 내용, 즉 근로 실질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사용자가 임의로 정하기 마련인 부수적 요소들로 근로자성을 함부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다수의 방송국들은 이 같은 형식적 징표들을 오히려 적극 악용해 왔다. 겉보기에 프리랜서처럼 보이도록 위장함이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방송계의 프리랜서들은 인건비 대신 제작비에서 임금을 지급 받는다. 또한, 실제 출퇴근 시간은 방송 일정에 맞춰 고정되지만, 사용자가 ‘특정하는’ 출퇴근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방송사고라도 나면 경위서를 작성해야 하지만 전 직원에게 적용되는 ‘취업규칙’의 적용 대상에서는 제외된다. 이들이 서명해야 하는 ‘프리랜서 위탁 계약서’는 실제 일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실제 일하는 내용은 노동자이나 외양은 프리랜서로 꾸며져 ‘무늬만 프리랜서’라는 웃지 못할 호칭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법원의 판단 요소들에 맞춰 ‘프리랜서’로 위장된 이들이 법의 테두리 밖 사각지대에 놓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면 1년 넘게 근속한 뒤 퇴사하면 지급 받는 퇴직금을 청구할 권리가 이들에게는 없다. 방송사고를 내지 않으려 일년내내 결근 한번 없이 출근해도 연차휴가가 부여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하루아침에 회사가 부당한 사유로 내쫓아도 노동위원회 등에서 이를 다툴 수 있는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자’로서 유기적 협력이 불가피한 방송 제작 현장 

  방송국들의 끈질긴 ‘위장 전술’에도 불구하고 방송 제작 현장 노동자들이 위 대법원의 핵심 판단 요소들에 근거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되는 배경에는 ‘방송 제작업의 특수성’이 있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 시 업무 내용은 사전에 방송국이 구체적으로 정해놓기 마련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노동 집약적으로 정해진 기한 내에 촘촘하게 얽혀 일의 완성물인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그 구조 속에서는 한 개인이 독립적으로 재량껏 판단하면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 노동자들의 법률 투쟁 성과가 계속 누적된다고 해서 어느 순간 프리랜서 방송 작가·아나운서가 근로자가 될 수 있을까. 최근 2년간 방송 제작 현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가 법률 대응으로 표출됐고, 승소한 사례는 축적됐다. 하지만 이 같은 법률 대응의 성과가 이어지자 방송사들은 근본적으로 왜곡된 고용 구조와 비정규직 남용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보다 개별 사안들을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그 방식은 종종 매우 심각하게 왜곡됐다. 나아가 노동위의 판정과 법원의 판결은 그 자체로 법(法)이 아니기에 사용자인 방송국에게 한꺼번에 특정 직종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 시킬 법적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다. 더욱이 개개인이 지난한 법률 투쟁을 통과해야 하는 시간은 고통스럽고 힘겹다. 언제나 법률 대응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은 사용자의 편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셀수록 사용자들은 근본적으로 모순을 해결하는 대신 증거를 없애고 법적 다툼을 오랫동안 지연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결국 카메라 뒤 비정규직들이 처한 근본적인 현실을 ‘함께’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집단적 대응’과 ‘입증 책임의 전환’ 

  최근 몇 년간 방송 비정규직들이 주축이 된 ‘방송스태프지부’와 ‘방송작가유니온’ 등이 결성됐다. 노동조합의 결성 등 집단적인 대응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거론되는 쟁점은 현재 대법원이 제시한 판단 징표들에 비춰 방송노동자 스스로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라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 틀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법원의 근로자성 입증의 전제는 ‘일하는 사람의 기본값이 근로자가 아니다’라는 것인데,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라는 법의 정의에 비춰보더라도 이 기본 전제는 변경돼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독립사업자인지에 대한 여부를 사용자가 증명하라며 입증책임을 전환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ABC 기준’을 다음과 제시했다. ▲A: 노동자는 업무 수행과 관련해 계약상이나 실제로 기업의 통제와 지시를 받지 않는다. ▲B: 노동자는 기업의 통상적인 사업 범위 외의 업무를 수행한다. ▲C: 노동자는 관례적으로 기업과 독립적으로 설립된 직종, 직업 또는 사업에 종사한다. 해당 기준은 일하는 사람의 기본값을 노동자로 전제하고 예외적으로 사업장에서 일하는 이가 프리랜서와 같은 도급사업자가 명백하다면 이를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가 ABC 기준에 따라 증명할 것을 주문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위해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방송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법원이 엄격한 판례의 잣대로 사용자에 대한 종속성의 정도를 일일이 판단함이 아니다.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서 한참 벗어난 오늘날의 노동 실태 등을 적극 고려하고 독립된 업무 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방송업의 특성을 반영해 노동법의 당초 제정 취지에 부합하는 제자리를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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