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 전 인천산곡남중 교장

[사회_한국식 교육과 시험능력주의]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맞물리며, 한국의 시험 중심 교육 시스템은 뛰어난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배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공교육에 대한 불신, 사교육 의존도 심화, 교육 기회의 불균등 등 교육계 내의 직접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교육 시스템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나타나고 있다. 이에 지금까지 한국이 교육 철학으로 고수해온 시험능력주의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와 관련해 오늘날 드러난 문제의 해결 방안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능력주의와 시험능력주의 ② 시험능력주의와 수능제도 ③ 한국식 시험능력주의와 진로선택 문제 ④ 한국의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

 

교육에서의 시험능력주의 영향과 진로선택 문제

 

전재학 / 전 인천산곡남중 교장

 

  우리 교육은 과거부터 지나치게 암기력 및 이해력 같은 개인별 특정 역량에 집중하면서, 경쟁에서의 승자를 제일로 하는 능력주의가 지배해 왔다. 그로 인해 우리의 교육적, 사회적 토양은 특이하게 공고해졌다. 여기에는 이른바 각자도생의 전략이 기저를 이뤘다. 리고 지금까지 별다른 저항 없이 국민 다수의 묵시적인 동의를 구가해 왔다. 이는 우리의 굳건한 교육 가치가 됐고, 성공과 출세지향의 국민 의식으로 고착됐다. 최근에는 빈익빈 부익부에 따른 기울어진 편향성과 능력 있는 기성세대의 ‘부모 찬스’에 의해 경쟁은 불공정한 게임이 됐다. 이런 경쟁에 의한 능력주의는 지나치게 결과만을 중시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에 교육적, 윤리적으로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사회학자인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 특유의 능력주의를 ‘시험능력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능력주의’ 현실이 사회병리적임을 세밀히 진단했는데, 그 핵심에 ‘시험’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시험능력주의에서는 국가가 인정하는 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 성적이 개인의 ‘능력’으로 판정된다. 이에 수능이라는 ‘시험’이 우리의 초중등 ‘교육’을 압도했다. 대학 입시는 사활을 건 초중등 12년 교육의 목표점이 되고 교육의 장은 경쟁을 당연시하는 전쟁터로 전락했다. 그 속에서 학생들은 사교육으로 쉴 틈이 없으며 불안과 긴장이지배하는 학교 문화를 이끌고 있다. 영국 조너선 거슈니(Jonathan Gershuny) 옥스퍼드대 사회학 교수는 “한국 청소년이 공부에 들이는 시간은 놀라운 수준을 넘어 기괴하다고 느껴질 정도”라 평했다. 또한 최근 집단유전학의 수능 킬러 문항의 출제 오류로 수험생들이 해외 석학들에게 확인을 구했는데 “터무니없이 어렵고, 푸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이것이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시험능력주의의 실체이다.

점수에 맞춘 진로선택 문제

  시험의, 시험에 의한, 시험을 위한 시험능력주의가 우리 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을 정도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초래했다. 단적인 예로 수능 점수에 맞춰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에 들어갔다가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교육부는 대학 신입생 30%를 전공 없이 입학하도록 하는 정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편 지난달 9일 강득구 의원이 교육부에서 받은 최근 4년간 고등학교 자퇴생 현황을 살펴보면, 고등학교 자퇴생이 대폭 증가해 작년에만 2만 3,440명이 학교를떠났다. 이 중 1학년 비중이 약 52%를 차지했으며, 이는 수능을 위주로 한 정시의 중요도가 높아진 대입제도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학생들은 정시 위주로의 체제 개편을 고려해 내신과 수행평가 등 기타 교내 활동으로 학습이 분산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수능을 대비하기 위해서 자퇴를 결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도 과거 전통과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 교육에서 과연 시험능력주의에 따른 결과 즉,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줄 세우기 내신 성적이나 대학입학을 위한 국가 공인 수능 성적만이 그 사람의 모든 능력을 공정하게 대변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빈부격차와 지역 및 학교별 차이가 시험 성적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한 채 단순 성적을 개인의 온전한 능력으로 간주하고 대학과 사회진출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도록 하는현 교육체제가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험능력주의는 과연 우리 교육을 발전시키는가, 아니면 후퇴시키는가. 이제는 과감히 그 효과를 논의하고 검증할 때이다.

  최근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대학 교육까지 이수하며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현재는 프린스턴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고교 재학 당시, 수학경시대회 참가를 희망했으나 단지 수학 공부를 늦게 시작했다는 이유로 수상의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한 학교에 의해 그 희망이 좌절되기도 했다. 획일적이고 개별적 능력이 무시된 채 시험 결과에만 치중하는 우리 교육의 단편적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시험능력주의가 초래한 경직된 교육

  시험능력주의의 부정적 여파는 매우 크다. 학생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며학교로부터 이탈해 검정고시를 보고 여러 해에 걸쳐 수능을 재응시하기도 한다. 대학 재학 시에는 온갖 스펙을 쌓으며 건국 이래 가장 뛰어난 청년들이란 평가를 받지만, 그 청년들은 단지 시험 성적에 의해 결정적 기로에 선다. 다양한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며 지속되는 시험에 폐인이 되기도 한다. 객관식 오지선다형의 시험 성적에 의한 시험능력주의는 토의와 토론, 질문이 배제된 교실 수업을 낳았다. 한때 성공적인 서울 G20 정상회의 후에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기자 회견에서 한국 기자들에게 우선권을 줬음에도 아무도 질문하지 못한 것은 언론계의 수치이자 우리 교육의 부작용 사례로 남아 있다.

  그뿐이랴. 과거 수능 만점을 받은 대학생들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문제 풀이의 무한 반복’과 ‘시험 문제 유형의 숙달’이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는 학생들의 전인적 차원의 성장이 불가능해 이들을 단지 유능한 문제 풀이형 로봇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학교 일선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시험이 끝난 학생들 대부분은 “시험 후에는 즉시 암기한 모든 것이 날아간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이런 시험능력주의는 교육의 본질에 얼마나 다가선 것인가. 이제 시험능력주의도 디지털 대문명의 4차 산업혁명시대에 적합한 ‘믿음’을 새롭게 창출해야 한다.

  전술한 바처럼 우리의 시험능력은 학생의 특정 능력에 힘입어 발현되기 쉽다. 그것은 주입식 지식에 절대적인 암기력과 이해력, 분석력으로 종합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다중지능으로 형성돼 있는바, 어느 한 영역의 편중적인 발현은 진정한 능력이라 볼 수 없다. 예컨대 물고기에게 나무를 기어오르는 능력으로 평가한다면 이는 지극히 불공정하고 수용할 수 없는 조치다. 우리의 시험능력주의가 바로 그렇다. 공부는 그 재능을 가진 소수자의 능력이 절대적이다. 공부에 재능이 없는 다수는 언제나 시험능력주의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시험능력주의로 본 한국의 인재상

  우리의 시험능력주의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재들은 과연 사회에서 제대로 된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그들이 비록 시험능력주의의 주인공일지라도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타적인 인물로 성장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선뜻 긍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이 땅에서 성공한 판검사·변호사·정치인·경영자·학자 등 전문 직업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한때 시험능력에 의해 발탁된 인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인성과 도덕성에서의 결함은 물론 사고력과 창의력까지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한다.

  시험 경쟁으로 성공한 인재들의 인성처럼 성적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우리의 교육은 문제가 크다. 필자는 40년 6개월의 대부분을 고등학교에서 봉직했다. 매년 입시철만 되면 어느 고등학교든 최우등권 학생들이 교대를 선택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어느 경제 구루(Guru)의 말을 소개하며 진로선택의 다양성을 열어줘도 대상자들은 ‘철밥통’을 운운하며 교사 직업을 선호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후 얼마나 성장하고 발전했을까.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라 했다. 교육 현장에서 목격한 상당수의 학력 우수자들은 정체와 침체로 학습능력이 정지해 있었다. 이것이 시험 성적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시험능력주의의 단적인 부작용이다.

  대한민국의 시험능력주의에서는 수능 성적이 곧 ‘능력’이다. ‘시험’은 ‘교육’을 이겼고 ‘적임자’보다 ‘시험 능력자’가 우선이다. 시험을 매개로 앞면에 ‘지배’가, 뒷면에 ‘배제’가 자리한다. 일찍이 조선을 4차례 방문한 비숍 여사는 1894년 조선 엘리트와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현실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중략) 편협하고 독단적이고 잘못된 자존심을 심어준다. 그리해 노동을 천시하는 개인주의 자아를 만든다. 공공선을 생각하는 정신을 파괴하고, (중략) 그 원인은 퇴보적이고 경직된 한국 교육제도이다”. 시험능력주의에 근거한 교육과 진로선택은 개인의 다양한 역량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며 결국 득보다 실이 크기에 개혁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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