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 한신대 영상문화학전공 강사

[방송은 노동자가 만든다] 

우리나라가 콘텐츠 강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이를 제작하는 방송노동자도 주목받고 있다. 스타 PD·작가들이 배출되고 있는 반면, 부당함에 시달리는 방송노동자들도 존재한다. 이에 방송노동환경과 방송노동자들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봄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방송노동업계를 들여다보며 이를 통해 그들의 부당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현실 속 방송노동자 ② 방송사의 부당한 계약 ③ 방송사가 나아가야 할 길 ④ 방송노동자에게 필요한 법

 

새로운 프레임으로 상생 전략 짜야 할 때

 

신정아 / 한신대 영상문화학전공 강사

 

  지난 9월 1일 방송작가·독립PD·출판편집자·아나운서 등 방송사에서 근무하는 프리랜서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한 ‘엔딩크레딧’이 출범했다. 故이재학 청주방송 PD의 동생 이대로 대표가 주축이 됐고, 직장갑질119 활동가 진재연씨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출범식이 있던 날, 엔딩크레딧은 한국방송협회가 주관하는 방송의 날 행사장에서 기습시위를 진행했다. 시위자들은 ‘우리는 방송을 만드는 노동자다’,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행사 참가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기습시위에 이어 열린 출범 기자회견에서 이대로 대표는 “미디어 속 화려한 영상과 연예인, 그 뒤편엔 피와 땀을 녹여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진짜 주인공들이 따로 있다. 바로 이들이 방송의 날 주인공”이라고 발언했지만, 우수한 방송인을 축하하는 자리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제작현장에서나 시상식에서도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이들의 현실인 것이다.

방송사 비정규직의 현실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가 작년 12월에 발표한 「방송사 비정규직 근로여건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KBS와 MBC, SBS, EBS를 포함한 지상파 방송사 13곳의 비정규직 구성원은 9,199명에 이른다. 또한, 재작년 신규 충원한 방송제작 인력의 64%는 비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 종사자의 32.1%인 2,953명이 프리랜서였고, 파견직은 1,769명(19.2%), 용역업체 1,406명(15.3%), 자회사 소속이 1,333명(14.5%)이었고, 직접 고용한 비정규직 기간제는 1,154명(12.5%)으로 가장 적었다. 1만여 명의 인력이 방송 제작에 투입되고 있지만, 불안정하고 차별적인 지위를 감내해야 하는 현실은 그야말로 비정규직 백화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엔딩크레딧이 전국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 45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프리랜서·비정규직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주 평균 68시간 이상 일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27.4%로, 근무시간이 52~68시간이라고 답한 경우도 27.1%에 달했다. 10명 중 4명은 ‘지난 1년간 임금체불을 경험’했고, 3명 중 1명 이상은 ‘근로계약서를 작성조차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73.2%가 ‘지난 1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겪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괴롭힘의 유형으로는 ‘모욕·명예훼손’이 54.9%로 가장 높았다.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대응에 대해서는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 답한 경우가 63.4%, ‘회사를 그만뒀다’고 답한 경우가 56%였다. 회사 혹은 노조나 노동부 등 관련 기관에 신고했다고 응답한 경우는 4.6%에 불과해 방송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대처 방법 역시 마땅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방송시장의 성장 뒤에 가려진 

  방송시장이 OTT 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잘 만들어진 콘텐츠의 탄생은 무한한 세계관의 확장으로 수익창출을 극대화하는 시대가 됐다. 한정된 지상파 시청자에게 의존하던 시장은 이제 글로벌 시청자들을 향한 속도전이 한창이다. 그러나 방송 생태계의 변화와 성장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처우는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고 있다. 이는 정부 산하 방송사에도 예외가 없었다. 9월 20일 정의당 류호정 의원실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와 일하는시민연구소가 발표한 「문체부 방송3사 프리랜서 활용실태」에 따르면 KTV와 아리랑TV, 국악방송에서 일하는 노동자 10명 중 7명이 프리랜서 혹은 비정규직이었다. 이들의 업무 환경을 살펴본 결과, 제작 관련자의 업무지시를 받고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주체는 방송사였다. 또한, 방송사 직원으로부터 업무결과에 대한 수정지시를 받고, 휴일근로나 연장근로 등 근무시간과 장소, 휴가 허가 및 과실로 인한 불이익 역시 방송사 직원에 의해 결정된다는 응답이 전체의 70% 이상이었다. 노동자성을 입증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음에도 이들의 고용은 불평등하고, 생계 역시 불안정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9월 21일 발행한 「방송프로그램 결방 피해 실태와 쟁점」에 따르면 방송제작인력 920명 중 24.3%가 결방 혹은 불방을 경험했고, 다수의 스태프는 결방 사실을 사전에 고지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방 안내 시점을 ‘프로그램 제작 중’이라고 응답한 경우가 43.7%, ‘프로그램 납품 후’라고 응답한 비율도 15.3%에 달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7월 31일 방송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위해 구체적인 피해 사실을 조사한 후, 지침을 마련한다고 발표했다. 촬영을 위한 이동과 대기에 소요되는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하고, 결방으로 입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현장점검을 해서 방송 분야 표준계약서 개정 작업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그런데 방송노동자들의 표준계약서와 처우개선을 위한 조사에서 반드시 검토돼야 하는 것이 있다. 방송사는 더 이상 TV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OTT 채널과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다양한 정체성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의 방송은 철저한 분업 형태로 각자 맡은 역할을 물리적으로 수행하는 단계별 업무였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방송은 기획부터 유통까지 매우 다양한 기술과 아이디어, 전문성이 결합된 복합노동의 형태로 수행된다. 따라서 노동·휴식·이동시간 등 물리적 잣대로만 계산될 수 없는 업무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 콘텐츠를 기획하는 단계에서 작가들의 아이디어와 기여도가 있다. 교양과 예능 프로그램 제작과정에서 기획은 제작과 편집, 유통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매핑과정이다. 새로운 포맷과 이야기의 개발은 노동시간 외 결과물에 대한 권리와 보상으로 이어져야 한다. 방송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이 굶지 않을 만큼의 밥과 교통비, 죽지 않을 만큼의 수면시간 보장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방송은 융합콘텐츠로 진화하고 있다. 일회성 프로그램으로 생산되고 재활용되는 시대는 가고, 끊임없이 각색되고, 파생되면서 생명력을 확장한다. 노동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생존형 지침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협력자로 인정받고 합당한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도록 개정돼야 한다. 비정규직 방송노동자들을 제작의 도구나 그림자로 취급하는 구시대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방송사들이 생존을 위해 진출한 유튜브 채널의 클립영상과 스핀오프영상 역시 방송노동자들의 기획과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이를 홍보하는 썸네일과 해시태그도매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산이 된다. 유튜브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업무는 본방송 연출과 작가 외에 에디터와 마케터 등 수많은 인력의 협업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이들의 노동은 여전히 그림자 속에 감춰져 있다. 지상파와 종편사들이 유튜브 채널을 통해 막대한 광고 수익을 얻고 있음에도 이에 기여한 노동자들에 대한 합당한 저작권과 수익 배분이 이뤄지는지에 대한 조사는 없다. 방송사업이 플랫폼 노동으로 전환되면서 현장에 투입되지 않는 수많은 인력이 컴퓨터 앞에서 콘텐츠 제작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노동과 권리에 대한 보장은 어떻게 마련돼야 할 것인가.
  방통위는 올해 말까지 허가 유효기간이 만료되는 34개 지상파 방송사업자 및 141개 방송국에 대한 재허가 심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방통위는 이번 심사에서 ▲방송의 공적책임·공정성의 실현가능성 ▲지역·사회·문화적 필요성 ▲방송프로그램의 기획·편성·제작 및 공익성 확보계획의 적절성을 중점 심사사항으로 선정했다. 또한 ‘공적책임·공정성 실적 및 계획의 적정성’ 심사항목에 환경·사회·투명(이하 ESG) 경영계획 등을 세부평가방법으로 추가했다. ESG 경영에서 ‘S’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의미한다. 공정한 노동조건과 복지혜택, 다양성 존중과 노동자의 건강 및 안전 보장이 해당된다. 고용 평등을 기반으로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뜻하는 것이다. 방송제작은 창의적이고 협력적인 작업이며, 콘텐츠의 스토리와 캐릭터가 수많은 대중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최적의 기술과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방송노동자들의 땀과 노력이 합당한 대가와 보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지침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진정한 창의성은 기획 단계에서 시작된다. 무수한 아이디어와 경험의 교차, 취재와 섭외 등의 과정에서 콘텐츠의 포맷이 만들어진다. 세계관 구축과 유통망에 이르기까지 기획 과정에서 결정되는 스태프의 처우는 제작의 모든 과정에서 세밀하게 검토되고, 존중받아야 한다. 또한 노동의 대가뿐만 아니라 성공한 콘텐츠의 수익 배분에서도 소외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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