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 공동대표

[방송은 노동자가 만든다]

우리나라가 콘텐츠 강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이를 제작하는 방송노동자도 주목받고 있다. 스타 PD·작가들이 배출되고 있는 반면, 부당함에 시달리는 방송노동자들도 존재한다. 이에 방송노동환경과 방송노동자들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봄에 따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방송노동업계를 들여다보며 이를 통해 그들의 부당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현실 속 방송노동자 ② 방송사의 부당한 계약 ③ 방송사가 나아가야 할 길 ④ 방송노동자에게 필요한 법

 

정의와 진실, 불의와 거짓

 

이대로 /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 엔딩크레딧 대표

 

  근로계약서란 무엇일까. 사용자와 노동자가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함에 있어서 필요한 최소한의 약속 장치다. 노동자라면 당연히 이러한 계약서를 직접 봤을 것이며 날인도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여전히 예외인 분야가 존재한다.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고 있는 방송. 바로 그 방송을 만드는 방송노동자들의 현실이다. 대부분 방송노동자는 그 최소한의 약속 장치인 계약서를 본 적조차 없고 심지어 계약서를 요청하는 순간, 그곳에서 해고당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이것이 오늘날 방송사의 민낯이다.
  이재학 PD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재학 PD는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 된 CJB 청주방송에서 14년을 일했지만, 그는 일하는 동안 단 하나의 근로계약서도 쓰지 못했으며 다른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약서 자체가 없으니 사실상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그는 아침 회의에 참석해 이런 부조리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동료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건, 인사권한도 가지지 않았던 직속 선임 국장으로부터의 부당해고였다. 14년간 부당한 처우 속에서도 그저 방송이 좋아 모든 것을 참고 견뎠던 이재학 PD. 그는 이후 싸움의 결과가 본인만이 아니라 모든 방송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판례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법률대리인과의 계약에서도 그의 마음이 드러났다. 소송 중 사측의 어떤 회유나 협상이 들어와도 소송을 포기하지 않고 판례로 남기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을 정도였으니 그 분노와 의지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재학 PD는 소송을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를 마치 성경 속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방송사이기에 최소한의 정의와 양심, 진실은 지켜지리라 믿었다. 그래서 1심 판결이 나기 전날까지도 소송 결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방송사 측에서도 본인들의 패소를 짐작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재판 과정에서 오랫동안 직접 업무 지시와 보고를 받아왔던 국장이 사측 증인으로 나왔을 때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가 동료였던 이재학 PD의 존재를 부정하고 위증까지 하는 것을 보며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학 PD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희망을 당시 청주지법의 판사가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아니 희망을 짓밟은 것이 아녔다. 정의와 진실을 내팽개쳤으며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다. 패소의 큰 이유 중 하나로 이재학 PD가 계약서도 없는 노동자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그 계약서의 부재는 사측인 방송사의 잘못이었다. 더불어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짓밟는 불법 행위였음에도 방송사의 편을 들어준 결과가 나왔다. 판사는 이재학 PD가 아닌, 방송사에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묻고 그 잘못과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재학 PD와 법률대리인이 제출한 수십 개의 증거는 무시당했고, 불과 몇 가지 되지 않는 사측 주장과 가해자 국장의 위증만이 인정된 부당한 판결이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눈과 귀로 겪었던 이재학 PD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이 전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분노했고, 진상조사위원회를 통해 모든 것이 잘못됐음을 밝혀냈다. 그렇게 진상조사 과정과 이후 항소심에서 진실이 밝혀졌고 가해의 주동자인 국장은 현재 위증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돼 곧 재판에 설 예정이다. 가해자에 대한 정확한 처벌은 이후 동일·유사 사건들에 경각심을 주고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이와 같은 진상조사와 항소심을 통해 우리는 이재학 PD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결국 그는 우리 곁을 떠난 후였다. 웃을 수만은 없는 승리의 결과를 그가 없는 자리에서, 필자는 그를 대신해 전국에 있는 수많은 방송노동자들과 나눌 수 있게 됐다. 항소심 판결 이후에서야 전국 방송사들은 노동자들에게 계약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송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외치던 생전 이재학 PD의 뜻이 현실로 이뤄지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방송사가 성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방송노동자들의 끝없는 싸움

  현재 방송사들이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내밀고 있는 계약서는 오히려 입막음용 계약서에 불과하다. 부제소합의 혹은 권리포기각서 등과 같은 비합리적이며 비윤리적인 내용들을 계약서 한 켠에 버젓이 적어놓고 방송노동자에게 날인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계약서 내용에 문제제기를 하면 돌아오는 것은 당장의 보복성 인사조치와 업무 배제일 것이니 방송노동자들은 문제를 알면서도 날인이라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소송이라도 시작하면 방송사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들을 인정하고 정상적으로 채용했을 때의 물리적 비용을 훨씬 넘어선 높은 소송 비용을 감당하면서까지 말이다. 이렇게 소송에 뛰어든 방송노동자는 거대한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과 같은 처지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현실은 이보다 그 힘의 차이가 훨씬 더 크다. 당사자들은 방송사가 가지는 거대한 권력에 정면으로 나서서 싸워야 하며, 싸움이 시작된 이상 잠시 쉬거나 숨어있을 그 어떤 곳도 찾을 수 없다. 언론·방송사가 가지는 특성 때문에 방송노동자가 겪는 부당함이 여론화되기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만큼 이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큰 용기가 필요하며 남은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래서 방송노동자들은 ‘법’이라는 창을 들고 ‘법’이라는 방패의 보호를 간절히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 노동위원회에서 다투고 있는 노동자들이 많지만 사실상 고용노동부와 일부 지방노동위원회는 그 기관명이 무색하리만큼 같은 지역 내의 방송사 눈치를 보느라 바쁘다. 이런 현실들은 이재학 PD처럼 소송으로 바로 직행하는 노동자들이 많은 이유다.
  그래서 법적 제도화와 방송통신위원회의 규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계약서 한 장조차 쓰길 거부하는 방송사는 「근로기준법」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업종 중 하나이지만 아무도 이를 제지하지 않고 있다. 법원의 판결조차 무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국의 많은 방송노동자들의 소송이 승소로 끝났음에도 여전히 그 판결을 왜곡하고 지키지 않으려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KBC 광주방송의 경우, 조연출 노동자성과 퇴직금을 인정한 판결에 불복했으며, 과거에 노동부로부터 사내 조연출들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한 차례 받고도 소송전을 이어 나간 상황이다. 더 심각한 상황은 소송을 했던 당사자들을 향한 보복성 인사조치와 또 다른 괴롭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다. 원직복직이라는 판결도 무시한 채 과거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보직으로 이동시키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보직을 만들어 배치하는 등 방송사는 또 다른 불법 행위만 저지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정능력이 없는 방송사의 이런 행태들을 규제하고 예방할 수 있는 법적 제도화가 시급하다. 예를 들어 그 시작점으로 환경노동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 국정감사에 문제가 되는 방송사 대표들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문제 해결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방통위에서는 2020년도와 같이 방송사 재허가 심사에 ‘방송 비정규직노동자’ 실태와 현황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 모두 방송사가 스스로 해결하면 좋겠지만, 오랜 세월 동안 권력과 이윤의 맛에 익숙해져 버린 방송사들은 더 이상 스스로 정화할 능력과 의지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회와 기업들의 부조리와 노동문제를 비판하고 뉴스거리로 일삼았던 방송사의 실상은 사실 그 어떤 곳보다 곯아있다. 이런 방송사들이 남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지금 방송사들이 외치는 그 ‘권리’를 보장받고 국민들에게 신의와 응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엔딩크레딧을 기억해야

 

  대부분 사람들은 방송노동자의 겉모습만 보고 동경하거나 선입견을 갖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회적 시선과 환경이 카메라 뒤에 있는 방송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을 입 밖에 꺼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는 않았을까. 누구나 그렇듯 일에 대해 자부심이 높은 방송노동자들이 여전히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감히 생각된다. 방송을 볼 때 그 엔딩크레딧의 이름들을 기억하면 좋겠다. 필자의 형이자 친구, 그리고 우상이었던 이재학 PD. 그가 남긴 뜻과 판례는 많은 방송노동자들에게 없던 길을 만들었으며 큰 무기를 줬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용기 있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당사자들도 많아졌고 그들을 응원하는 목소리도 늘어나고 있다. 이렇듯 당사자인 방송노동자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잘못이 아니다. 언제든, 어디에 있든 응원할 것이고 또 함께 손잡고 해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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