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희 /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수료

본 지면은 교내·외 대학원생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소통의 장’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됐다. 이번 호에서는 취미였던 물레를 통해 얻은 긍정적인 에너지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각자의 방식대로 일상 속에서 중심을 잡고 구부러진 부분을 다듬어 가며 우리의 마음은 단단해진다. 〈편집자 주〉

 

흙으로 빚은 일주일이 모이면

최송희 /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수료

 

  “흙은 자신의 움직임을 전부 기억해요”

  잘 반죽한 백토를 물레로 돌리며 그릇을 만들던 날이었다. 그릇을 다 빚었으니, 물레 위의 도자기를 나무 받침대에 옮길 차례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모양이 잘 잡혀서 기분이 좋았던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손을 휘둘렀고, 도자기 윗부분은 약간 찌그러졌다. 놀란 마음을 다잡고 찌그러진 부분을 손으로 문질렀다. 문지르기만 하면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올 것 같았다. 그때 물레 선생님이 말했다. 흙은 내가 손으로 누르고 끌어올린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이다. 흙은 뜨거운 가마 속에서 구부러짐과 두드림의 기억을 따라가며 비로소 단단한 도자기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의 말을 곱씹어봤다. 그리고 도자기는 사람의 마음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마음에도 도자기처럼 매일 수많은 자국들이 새겨진다. 때로는 누군가의 말이 상처가 돼 내 마음을 아프게 짓누르기도 하고, 혹은 오히려 더욱 단단해져서 새로운 모양이 되기도 한다. 갑자기 찾아온 행복한 순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마음이 부풀어 오를 때도 있다. 이렇듯 마음에는 다양한 순간들이 저마다의 자국으로 남는다. 손으로 도자기의 모양을 만들어가듯이.

  그저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물레가 더욱 특별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일상에 재미를 더해주던 ‘물레 돌리는 시간’은 특별함을 줬을 뿐 아니라 나를 위로해주기도 했다. 매일 밤,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날이 많아졌다. ‘오늘 내 마음에는 어떤 손자국이 새겨졌나?’하고 말이다.

중심 잡기

  지난 2년 동안 내 취미는 물레로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매주 일요일, 10시가 되면 도자기 공방으로 향했다. 밤새 일을 하느라 잠을 못 잘 만큼 바쁜 주말에도 공방에는 꼭 다녀왔다. 부드러운 흙을 두 손으로 감각하는 약 두 시간 남짓의 시간은 건조하기만 했던 일상에 활력이 됐다. 내게 물레는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찾게 되는 즐거운 취미였다.

  공방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꼬박’이었다. 꼬박은 물기가 촉촉한 상태의 질흙을 반죽하는 것을 의미한다. 흙덩이 안의 공기를 빼내기 위한 작업이다. 꼬박을 잘하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흙이 잘 반죽되지 않았다. 선생님의 도움이 없던 날에는 물레를 돌리다가 흙 안의 기포가 너무 많이 생겨서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일일이 칼로 기포를 찔러서 없애고 다시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는 번거로움을 거치면서 꼬박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모든 일에는 기초가 중요한 법이었다. 꼬박으로 잘 반죽한 흙은 원뿔 모양으로 만든 후, 물레판 가운데에 고정시킨다. 다음으로는 물레를 작동시키고 손에 적당히 물을 묻혀 흙의 중심을 잡아가야 한다. 두 팔꿈치는 양쪽 무릎에 고정하고, 오른손은 흙을 앞으로 밀고, 왼손은 흙을 위로 밀어 올린다. 그 과정에서 흙의 높이는 높아졌다가 낮아지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중심을 잡아간다.

  상체의 무게를 실어서 흙의 중심을 세우다 보면, 내 삶에도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 당시의 나에겐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마음의 튼튼한 중심이 필요했다. 작사가로 데뷔한 지 약 일 년이 지났을 때였다. 작년에 나는 79개의 가사를 썼지만 발매된 곡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쓴 가사가 선택받지 못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심란함도 커졌다. 게다가 집안에서는 소란스러운 일이 생겼고, 대학원 일과 과제로 하루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졌다. ‘그저 쉬고 싶다’라는 한계에 가까워졌을 때, 물레 하러 가는 주말이 찾아왔다. 물레 앞에서는 흙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 손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적절한 힘을 주게 된다.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이 느껴지면 어느새 지난밤의 고민과 걱정들은 사라지고 오롯이 지금 여기의 ‘나’만 남는다. 물레가 한 바퀴 회전할 때마다 내 마음의 무게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듯했다. 물레를 하고 온 날에는 일주일을 살아갈 힘이 다시 생겨났다. 마치 나의 고민을 하나씩 비우러 가는 기분으로 공방의 문을 열었다.

  흙을 만진 뒤에는 손을 아무리 씻어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흙 때가 곳곳에 남기 마련이다. 손톱 밑에 하얗게 남은 흙, 바지에 몇 방울 튄 흙 방울들. 집으로 가는 길에 발견한 그런 자국들은 뿌듯함을 줬다. 오늘도 물레를 잘하고 왔구나. 오롯이 그 순간에 빠져 있었구나. 그렇게 만들어낸 행복 속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힘차게 돌아가는 물레가 있기에 다시 글을 쓰고, 다시 출근할 수 있었다. 일 년이 지나고 나니,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도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소 깨달았던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릇에 담은 것

  물레 위에서 만든 도자기는 굽을 깎는 작업을 거친다. 두꺼운 그릇의 바닥을 얇게 깎아야만 가마 안에서 도자기가 깨지거나 갈라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단, 너무 얇게 깎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흙이 얇아지면 칼날에 흙이 찢겨 구멍이 뚫린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도 흙이 찢어지는 경우가 있다. 정성껏 만든 도자기일지라도 결국 버려야만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버림’의 순간이 마냥 슬프고 아쉽지는 않았다. 버려진 도자기들과 남은 찌꺼기 흙은 물을 섞어 잘 반죽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은 흙덩어리들도 전부 쓰임이 있다는 것이 왜인지 모를 위안을 줬다.

  글을 쓰다 보면 남겨지는 글보다 버려지는 글이 더 많음을 깨닫게 된다. 더 좋은 이야기와 문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버려지는 문장과 단어가 생기는 것이다. 세상에 내보이지 못하는 글들이 때로는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글들 또한 언젠가 다시 꺼내 볼 수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내가 기록해둔 문장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물레를 하고 나서부터는 글이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면 남겨지는 흙들을 떠올렸다. 언젠가 다시 물레에 올려지기 위해 부스러기로 흩어져 있던 흙을 말이다.

  물레를 돌리며 바쁜 일상에서 여유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최근에는 어쩔 수 없이 물레를 그만두게 됐다. 올해 첫 자취를 시작하면서 신경 쓸 것들이 늘다보니, 제일 먼저 포기하게 되는 것은 취미생활이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서 무기력함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무기력함에 계속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다시 공방에 가게 될 날을 기대하면서 물레의 빈자리에 다른 행복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요즘 나의 행복은 ‘나를 위한 요리를 그릇에 담아내는 일’이다. 도자기 위에 내가 만든 요리를 담으면 한 숟갈 뜨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든든해진다. 나를 위해 애쓰는 것의 즐거움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하루 살아내기도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 당장 해결되지 못할 고민의 무게는 무겁고, 그렇다고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도 없다.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스스로가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상황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그럴 때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려 애쓴다. 물레를 돌렸던 것,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것 등. 이것들이 모여 나의 일상은 더욱 견고하게 완성된다. 가마의 뜨거움을 견디고 나온 단단한 도자기처럼.

  꾸준히 쌓아왔던 물레의 시간은 지금까지도 나의 중심을 단단하게 붙잡아 주고 있다. 꼬박 반죽도 어려워하던 내가 스스로 그릇을 만들었던 기억은 지친 나에게 용기를 줬다. 차분한 마음으로 완성해나가는 과정의 뿌듯함을 이제는 안다. 어제와 오늘의 여러 손자국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됐듯, 내일의 내 마음에는 더욱 경쾌하고 다정한 손자국이 남길 바라며 오늘 밤도 일기장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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