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 역사학과 석사과정

본 지면은 교내외 대학원생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소통의 장'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됐다. 이번 호에서는 치열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 두 나라 간의 역사에 담긴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현재를 설명하기도 하며 때로는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편집자 주〉

키예프 루스, 우크라이나인가 러시아인가?

안성민 / 역사학과 석사과정

 
 

  작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2013년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으로부터 심화한 두 나라 갈등이 전면전으로 확전됐다. 침공 3일 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대통령은 긴 연설로 침공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이 연설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잘못을 비판하는 동시에,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본래 러시아 영토의 일부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고대부터 우크라이나 지역민들이 스스로 러시아인이라고 인식했으며, 해당 지역도 러시아 일부로 여겨졌다고 주장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소련 성립 과정에서 레닌은 권력을 위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타협해 ‘러시아의 영토’ 일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었고,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해당 영토가 우크라이나라고 설명했다.
  이런 푸틴의 주장에 우크라이나는 반발했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린스키(Volodymyr Zelenskyy) 대통령은 작년 9월 11일, 연설에서 러시아에 “아직도 우리가 너희와 한 민족/나라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반문했다. 서방 학계에서도 예일대의 티모시 스나이더(Timothy Snyder) 교수가 “레닌보다 100년 전에 이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존재했으며,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라고 반박했다. UC 버클리의 치한 투갈(Cihan Tugal) 교수는 “푸틴의 견해가 러시아의 민족주의만을 정통으로 보고 다른 모든 소련의 구성원들과 그들의 민족주의를 인공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라며 지적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동원된 역사는 우크라이나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엮이는 양상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국가의 정체성이라는 부분을 살펴보면, 두 나라 모두 키예프 루스라는 고대국가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고, 서로 정당한 후예임을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조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두 나라의 정체성에 대한 역사 논쟁을 파악하기 위해 이 키예프 루스를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키예프 루스는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두 나라가 이를 두고 다투는 것일까. 키예프 루스와 이후 우크라이나 및 그 주변 지역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양측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키예프 루스/우크라이나 지역의 역사

  키예프 루스는 9세기 무렵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 지역에서 형성된 국가이다. 키예프 루스는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발트해-흑해-콘스탄티노플을 연결하는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번영했다. 그러나 11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쇠퇴로 발트해-흑해 무역이 줄어들면서 무역 거점이던 키예프도 자연스럽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분할 상속제로 인해 잦은 분쟁에 시달리던 키예프 루스는 13세기 등장한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이후 키예프 주변 지역은 몽골 제국의 일부였던 킵차크 칸국 영토로 편입됐고 잔존한 공국들은 몽골인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15세기 무렵 킵차크 칸국은 티무르 제국과의 전쟁과 내부 분열로 현 드네프르강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이 지역은 영토를 확장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국경이 되면서 동슬라브어로 U(인근), Kraina(변경), 즉 변경지대(Borderland)라는 의미의 ‘우크라이나’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편 15세기 말 우크라이나 북동쪽에서는 키예프 루스의 후예를 자칭하던 모스크바 공국이 지역의 패권 분쟁에서 승리하면서, 러시아 국가의 모체가 탄생했다. 이렇게 우크라이나 지역은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형성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변경지역으로서 남서쪽에는 타타르족과 잔존하던 몽골족 세력을, 그리고 북동쪽으로는 새롭게 등장한 러시아 차르국을 접하게 됐다.
  16세기부터 이 ‘접경’ 지역에서는 러시아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농노의 종속화를 피해서 도망친 농노와 토착민이 모여 카자크라고 불리는 약탈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약탈이 생업이었지만, 점차 러시아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고용돼 국경을 지키는 용병이 되는 과정을 겪으며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층은 가톨릭을 신봉했고, 당시 동방 정교회가 우세하던 우크라이나 지역에 가톨릭이되 동방 정교회의 전례를 유지하는 우니아트 교회를 보급하려 했다. 이는 종교 갈등을 유발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반발하는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노들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그러던 중 1654년,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항하는 자포로지예 카자크의 지도자 흐멜니츠키는 같은 동방 정교회를 신봉하던 러시아와 페레야슬라브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지역이 러시아의 영역이 되는 조건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후 이 지역은 러시아 일부가 됐고,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지역은 1917년 짧은 독립을 영유할 때까지 계속 러시아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됐다.

우크라이나의 시각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키예프 루스의 적통’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역사인식은 18~19세기경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발흥과 함께 등장한 저자 미상의 《루시인의 역사》가 큰 영향을 끼쳤다. 진위에 논란이 있는 이 책의 서술에 따르면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이후, 키예프 루스의 전통과 유산은 이 지역에서 활동한 카자크들에게 이어졌고, 이들은 폴란드의 압제에 맞서 지역 토착민과 농노들을 수호하고 동방 정교회의 신앙도 지킨 정의로운 영웅이자 키예프 루스의 후예가 됐다. 더 나아가 이 책은 ‘루스’라는 이름에서 온 러시아라는 명칭이 키예프 ‘루스’를 계승한 우크라이나에 의해 마땅히 사용돼야 할 국호이고, 그간 러시아에 의해 빼앗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역사 인식의 전반은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로 계승됐다. 근대 미국의 우크라이나계 역사학자인 야로슬라브 펠렌스키는, “현 러시아의 모체인 중세 모스크바 대공국이 키예프 루스를 계승한 국가라고 할 근거가 미약하다”라고 지적했다. 또 전통적으로 폴란드어에서 현 러시아인은 ‘모스칼리’로 불렸고, 러시아인이라는 말은 원래 현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지칭해서 사용해야 할 단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시각

  러시아의 시각은 우크라이나와 상반된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키예프 루스가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공동 뿌리’라고 주장한다. 또 이들 중에서도 러시아가 키예프 루스의 적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키예프 루스 이후 세워진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키예프 루스의 후예임을 자처했고, 모스크바 대공국이 현재 러시아의 모체에 해당하기에 키예프 루스는 러시아가 계승했다고 말한다. 러시아는 키예프 루스 멸망 이후 이 지역에서 통일된 국가가 나타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 카자크 집단이 키예프 루스를 계승했다는 증거가 미흡하다고 주장한다. 즉 키예프 루스는 카자크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동슬라브권 국가들의 공동 조상으로 봐야 하며, 우크라이나가 주장하는 키예프 루스와의 연결고리는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키예프 루스는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 간 다양한 분쟁에 등장하고 있다. 가령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 대해서 우크라이나는 과거 이곳이 키예프 루스의 영토였고, 선주민이 우크라이나계였다는 이유를 들며 자국의 영토가 돼야 함을 역설한다. 반면 러시아는 키예프 루스가 돈바스 지역까지 영토가 있었다는 근거가 미약할뿐더러 사실상 무인 지대에 가까웠으며, 현재 러시아인의 비중이 크기에 러시아의 영토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키예프 루스는 면밀히 확인하기 어려운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도 역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각국의 목적과 입장에 필요한 근거로 활용돼 전쟁과 정치에 동원되는 모습을 보인다. 정치에 동원되는 역사에서는 수단이 진실 앞에 선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 분쟁과 목적이 얽혀 있는 역사서술을 읽을 때,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의도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