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5.5 화 23:34
특집
[생태] 윤리적 의무로 빚어진 채식최훈 /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윤영빈 편집위원  |  ybyca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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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호]
승인 2020.05.05  01:5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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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지금, 우리의 이야기 ③ 채식의 세계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와 ‘자원고갈’은 작금의 지구 생태계를 대표하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무한하게 생산하고 무한하게 소비하는 경제 체제가 구르고 굴러 전 인류의 생존을 서서히 위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협은 불공평하게 배분돼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이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반면, 방패를 준비할 누군가에게는 그 무게가 미약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환경이슈가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의 위협으로 다가온 지금, 우리에게 어떤 고민이 필요한 지 찾아가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지배에서 공존으로 ② 기후변화와 환경 불평등 ③ 채식의 세계 ④ 새로운 가능성, 생태배당

   
 

윤리적 의무로 빚어진 채식

  채식주의자는 국어사전에 따르면 “고기류를 피하고 주로 채소, 과일, 해초 따위의 식물성 음식 위주로 식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채식주의자는 다시 고기류를 어느 정도까지 피하느냐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고, 어떤 동기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됐느냐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다.

  먼저 첫 번째 분류에 따르면 고기는 물론이고 고기의 부산물이라면 우유든 달걀이든 전혀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도 있고 우유나 달걀까지는 먹는 채식주의자도 있다. 물고기까지는 먹는다고 하는 채식주의자도 있고, 윤리적으로 사육하고 도살한 고기는 먹는다고 하는 ‘윤리적 육식주의자’도 있다.

  이번에는 채식주의의 두 번째 분류를 보자. 취향 때문에, 그러니까 고기를 먹지 못해서 채소 따위만 먹는 사람도 있다. 현실에는 거꾸로 채소를 싫어하고 고기를 씹을 때의 느낌과 육즙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고기를 씹을 때의 싫은 느낌 때문이든 고기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든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취향에 의한 채식주의자가 되겠다. 이 세상에서 채식주의가 되는 가장 많은 동기는 종교 때문이다. 힌두교나 제칠일안식일교 신자들 그리고 불교의 수도자들은 대체로 채식을 하는데 종교의 교리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지만 특정 종교와 상관없이 윤리적 반성에 의한 신념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윤리적 채식주의자’라고 불러 보자.

  사실 취향에 의한 채식주의자의 경우에는 ‘주의자’라는 말을 붙이기가 어렵다. ‘주의’라는 것은 굳게 믿는 신념을 말하는데, 이들은 무슨 신념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입맛 때문에 안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기호의 영역인 흡연의 경우에 ‘흡연주의자’니 ‘금연주의자’니 하는 말을 안 쓰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와 반면에 종교에 의한 채식주의자나 윤리적 채식주의자는 어떤 신념에 의해 채식주의자가 됐기에 ‘주의자’라는 말에 맞춤하다. 그러나 그 확장성에서 종교에 의한 채식주의자는 한계가 있다. 그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근거는 결국에는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교리는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설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신의 명령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인데 그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윤리는 보편성을 지향한다. 어떤 행동이 옳다면 같은 조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옳고, 어떤 행동이 그르다면 같은 조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른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채식주의자는 고기를 먹는 행동이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취향이나 종교는 논리적인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입맛이 다르다는데 무슨 수로 바꿀 수 있겠는가. 종교를 갖게 된 계기는 대체로 어릴 때부터 믿어왔거나 어떤 계시를 받아서이지 논리적인 반성을 통해서는 아니다. 반면에 윤리는 단순히 호불호가 아니라 보편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윤리적 채식주의자는 대체 어떤 근거로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까. 예컨대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주장은 취향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싫어한다고 해서 이 주장을 받아들이고, 좋아한다고 해서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 그래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호불호가 아니라 이성적 판단에 의해 위 주장을 올바른 윤리적 판단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무로 삼는다. 아마 이 경우에는 나도 누군가로부터 이유 없이 괴롭힘을 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이유 없이 괴롭혀서는 안 되겠다는 역지사지의 사고를 펼쳤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이유 없이 괴롭힘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 윤리적 판단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될 수 있다.

  윤리적 채식주의를 주장하는 근거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가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동물을 사육하거나 도살해야 하는데, 열악하고 잔인한 동물의 사육과 도살은 널리 알려져 있다. 웅덩이에서 뒹굴고 똥오줌을 가릴 줄 아는 돼지를 더러운 시멘트 바닥의 우리에서 기른다든가, 흙을 쪼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습성이 있는 닭을 날갯짓도 할 수 없는 철망으로 된 좁은 우리에 가둬 놓는다. 사람으로 치자면 똥오줌이 뒹구는 방이나 정원이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평생을 살게 하는 것과 같다. 물론 돼지나 닭은 인간보다 머리가 나쁘다. 그러나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똥오줌이 뒹구는 방이나 정원이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통을 안 받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에서 ‘다른 사람’ 자리에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를 집어넣는다면 이 윤리적 판단은 동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괴롭힘을 받는다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존재를 이유 없이 괴롭히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채식은 윤리의 영역이 된다.

  우리가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사육되고 도살되는 동물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환경도 오염시킨다. 환경은 고기를 먹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고 온누리 사람들의 것이며, 특히 미래 세대에게 빌려온 것이기 때문에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다른 존재에게 괴롭힘을 주는 윤리적 문제가 된다. 과거 사회에서는 농가에서 소는 한두 마리, 돼지나 닭이라고 해도 여남은 마리 정도 길렀기 때문에 환경 문제라는 것이 생길 것이 없었다. 이들 동물을 기르는 데 드는 여물도 들판에 있는 꼴이나 인간이 먹다 남은 음식을 주었으며, 동물의 똥오줌도 거름으로 쓸 정도의 양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영세적인 축산으로는 저가로 대량 공급을 할 수 없기에 수백 마리에서 수만 마리까지 공장식 사육을 한다. 그러다 보니 위에서 말한 밀집 사육 때문에 과거 사회와 다르게 동물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게 되고, 또 거기서 환경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노동의 종말》(1995)이나 《소유의 종말》(2001)로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J.Rifkin)은 《육식의 종말》(2002)에서 그런 환경 문제들을 고발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우선 동물의 똥오줌은 워낙 대량이기 때문에 거름으로 쓸 수도 없다. 1만 마리의 소가 내놓는 노폐물은 10만 명이 사는 도시의 쓰레기와 맞먹는다고 한다. 미국의 대규모 농장의 똥오줌은 호수를 이룰 정도인데, 비가 오면 강으로 흐르게 돼 대지를 오염시킨다.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동물의 똥오줌뿐만 아니라 트림도 환경을 오염시킨다. 한 농장에서 수만 마리의 소를 키우므로 소의 되새김질에서 나오는 트림은 자동차 매연보다 더 대기를 심각하게 오염시킨다고 한다. 이런 오염은 사육 동물이 먹는 사료와 관련이 깊다. 과거 영세농에서 소를 먹이는 여물은 주로 풀이었지만 지금의 사료에는 곡물이 많이 들어간다. 풀로 그 많은 소를 다 먹일 수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곡물을 먹은 소가 기름기가 많아 소비자로부터 환영을 받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블링이 많은 소고기가 그것이다.

  이 곡물 사료를 만들기 위한 콩을 재배하기 위해 아마존의 열대우림을 파괴한다. 한 달에 축구장 1만 6천 개 넓이의 삼림이 없어진다고 한다. 콩을 재배하거나 사육을 하는 데 드는 물도 엄청나다. 10파운드의 스테이크 생산에 사용되는 물은 한 가족이 일 년 내내 사용하는 물의 양과 맞먹는다고 한다. 분배의 문제도 생긴다. 이 콩을 인간이 직접 먹으면 훨씬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데, 그것을 소에게 먹여 그 소고기를 먹는다. 13파운드의 곡물을 들여 겨우 1파운드의 소고기를 만든다고 한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굶는 사람이 있는데, 다른 쪽에서 그들을 먹일 수 있는 식물성 단백질을 희생 시켜 동물성 단백질을 먹는 것은 분명히 윤리적인 문제가 된다.

  우리는 분명 과거 사회보다 싼 값에 햄버거나 치킨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이렇게 똑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고, 물과 토양과 대기를 오염시키고, 삼림을 파괴하고 물을 낭비하고, 배곯는 사람을 방치한 결과이다. 윤리적인 채식이 꼭 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과거 사회의 사육 방식으로 생산된 고기를 먹는 것만으로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동물의 고통과 환경 오염을 줄일 수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고깃값은 지금보다 훨씬 비싸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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