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경 / 국민대 건축대학 강사

도시·사람·건축 ② 도서관이 된 마을, 구산동 도서관마을

도시·사람·건축. 다시 말해 도시에서 사람과 삶이 바라는 건축의 양태는 어떤 것일까. 기술적으로 높아지는 도시의 빌딩 숲 사이에서도 사람들과 삶의 필요로 인해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를 지니고 새로이, 혹은 다시 태어나는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보고자 한다. 이번 기획에서는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구산동 도서관마을, 마곡 서울식물원,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을 주제로, 각 건축공간이 지니고 있는 각기 다른 가치와 의미들을 연재를 통해 살펴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민주주의의 상흔과 성취,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② 도서관이 된 마을, 구산동 도서관마을 ③ 도심 속 녹색공간, 마곡 서울식물원 ④ 문화와 예술의 광장,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지역의 공공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백선경 / 국민대 건축대학 강사

  동시대에 이르러 공공성 창출을 위한 ‘참여(Participation)’는 더 이상 새로운 실천이 아닌 당위론적 위상을 점하고 있다. 특히 공공건축의 경우 지역 주민을 위한 생활기반시설로서 공공성 가치의 구현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부재해왔다. 이에 과정상의 주민 참여가 주요 사항으로 논의되고 있다.
  은평구립 구산동 도서관마을은 주민들이 함께 ‘참여’해 건립한 지역 도서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개관 후 4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다수의 언론을 통해 ‘좋은 공공건축물’로 소개됐으며, 최근에는 도서관의 기획과 운영까지 주민이 개입한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특정 지역의 장소성과 공공성을 ‘좋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일까. 지역 주민들의 참여는 어떻게 시작된 것이며, 이는 무엇을 다르게 하는 것일까. 구산동 도서관마을 사례를 통해 설명회 및 공청회 등 형식적인 절차로서의 참여 여부에 대한 논의를 넘어, 기획 이전 단계에서 이뤄진 주민들의 논의와 실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참여’하는 사람들, ‘공동체’의 의미를 제고해 보고자 한다.

구산동 도서관마을 내부전경_사진제공 백선경
구산동 도서관마을 내부전경_사진제공 백선경

구산동 도서관마을의 건립과 참여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에 위치한 도서관마을은 기존의 다가구·다세대 총 8채의 건물을 리모델링 및 신축해 도서관 시설로 만든 것이다. 2012년 9월 도서관마을의 조성계획 수립 이후 2013년 5월에 이르러 설계발주가 공고됐고, 구체적인 계획 단계를 거쳐 2014년 4월에 착공해 2015년 11월 개관했다. 이같은 통상적인 공공건축 건립 과정에 실제 지역 공동체는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것일까. ‘공동체가 잘 참여했다’의 실체는 무엇이며, ‘공동체’는 실로 누구인가. 이들은 건축에 있어 무엇을 결정하고 어떻게 영향을 끼쳤을까.
  시작점에는 지역의 문화시설 부재라는 현황 속에서 주민들의 도서관 모색과 건립 추진 논의가 있었다. 학부모들의 적극적인 요구로 2001년 대조동 주민센터 내 어린이도서실이 만들어졌고 자원봉사로 운영됐다. 주민들은 도서관 확장을 추진하며 스스로 지역의 시민단체와 협력해 축제를 열고 관련 공무원들과 지속적인 소통을 이어갔다. 이에 2005년 구(舊) 파출소 건물을 리모델링한 ‘대조동 꿈나무 도서관’이 개관해, 주민들이 ‘꿈나무지기’로 봉사하며 도서관의 운영과 관리를 맡았다. 이들은 은평구 내 도서관의 규모 뿐 아니라 수 확장의 필요성을 깨닫고 지역 주민들의 서명운동을 받아 청원서를 제출했다. 구는 이를 수용해 2008년 구산동 일대 부지의 매입을 시작했으나 당시 예산 문제로 사실상 무산됐다. 한편 당시 주민들은 비영리민간단체인 ‘마을엔도서관’과 실질적인 모임 장소로서 ‘마을엔카페’를 만들어 여러 도서 관련 프로그램들을 개최했다.
  2012년에 이르러 구의 제안으로 주민들이 ‘주민참여예산사업’에 적극적으로 공모해 이에 선정됨으로써 본격적인 도서관 건립이 추진된다. 주민들은 당시 구의 도서관진흥팀과 함께 현장을 돌아보며, 예산 부족을 고려해 신축이 아닌 리모델링 방법으로 ‘여러 채’를 함께 묶는 ‘책의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논의했다. 특히 ‘더불어 만들어가는 책마을 조성’이라는 제목으로 기존 건물을 각각 활용한 8가지 테마를 구상했다. 단순히 책을 보관하고 빌리는 기능적인 공간이 아닌 동네 주민들이 만나고 경험하는 ‘장소’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는 건축물의 규모와 방법 뿐 아니라 정체성과 컨셉, 구체적인 프로그램까지 모두 주민들을 중심으로 기획됐음을 의미한다.
  이후 조성계획이 수립되며 주민과 관의 합의를 통해 ‘도서관마을’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이어 2013년 1월까지 진행된 기본계획 연구용역에도 주민들이 ‘도서관활동가’로 참여했다. 이들은 구산동 및 인근 도서관의 실태조사와 주민 설문으로 공간기획 프로그램을 조사해 도서관마을의 활성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후 5월에 설계발주가 공고돼, 지금의 도서관마을 설계안이 당선됐다. 당시 발표 자료와 평가위원회 회의록을 참고해보면 나머지 팀들이 각 건물을 테마별로 조성하는 것에 주력한 반면, 당선작의 경우 ‘마을’처럼 각각의 특성 뿐 아니라 ‘연결’을 강조한 점에서 큰 점수를 받았다.
  사실 건축가에 의한 구체 계획단계에 이르며 주민들이 실제 건축가를 만난 횟수는 도서관 답사를 비롯해 공식적인 설명회 4회로, 이외에 주민대표들이 따로 접촉한 것을 포함하면 7회 정도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모두 설계안에 대한 협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필요한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전달한 것은 있었으나, 사실상 계획단계에서 주민들의 참여는 건축물의 형태·재료·구조와 같은 물리적인 사항과 관련해 영향을 주고받았다기보다 도서관 조성을 위한 주민 축제 등의 활동에 집중됐다. 실제 건축 당시 도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구조 및 예산 문제로 계획의 일부가 수정된 경우가 있으나 주민 요구 또는 협의를 통해 크게 변동된 사항은 없다. 기능 변경이나 좌식으로의 대체, 가구 배치 변경 등의 정도였다.
  계획에의 의견 제시와 반영이라는 좁은 관점에서만 본다면 구산동 도서관마을 건립에서의 ‘참여’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주민들은 이미 기획단계에서 조성과 관련한 주요 사항들의 결정에 모두 개입할 수 있었고 관은 주민들의 의견을 가장 잘 이해하고 구체화한 건축가를 선정했다. 주민조직은 지역의 도서관 조성과 향후 운영 및 사용에의 주민 참여 방안을 스스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를테면 인근의 학교를 찾아가 청소년운영위원회를 조성했고, 관과의 협력 속에서 지역 주민 동아리를 다수 만들어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개관 이후에도 주민 협동조합이 도서관 운영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주민 대표 중 MP(총괄계획가)로 활동한 이가 문화정책팀장으로 배치되는 등 기획 및 계획 과정에서 참여한 주민들이 현재 구산동 도서관마을에 상당수 관련돼 있다.

‘참여’를 통한 생산의 목적과 의미

  철학자 발터 벤야민(W.Benjamin)의 견해에 따르면, 건축은 작가(Artist)에 의해 만들어지는 훌륭한 작품(Art-work)이자 사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새로운 조건들을 총체적으로 수용하며 ‘생산’되는 실체다. 이러한 견지에서 미국의 미술 비평가이자 역사가인 할 포스터(H.Foster) 또한 오늘날 예술이 작가의 영감뿐 아니라 여러 확장된 조건들이 개입하는 일종의 다층적 장이며, 심지어 결과에 이르기까지 주체(들)와 제도·대상·행위 역시 계속해서 다른 힘에 의해 위치가 재규정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는 참여를 통한 결과 창출을 마치 여러 의견이 합쳐지고 반영된 일종의 ‘종합선물세트’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계획 과정에 초점을 맞춰 참여에 대한 유형과 방법론에 대해 고민한다. 오늘날 많은 프로젝트에서 공동체는 단일한 속성의 협의체나 위원회 등으로 조직화된다. 물론 실질적인 사용자들의 의견과 반영은 매우 중요하며, 일련의 유형과 방법은 프로세스 추진에 있어 상당 부분 결과의 도출을 이롭게 한다. 그러나 참여를 통한 결과의 궁극적 목적이 공공성임을 다시금 상기해 볼 때, 이러한 공공성은 할 포스터의 말대로 일련의 과정에서 여러 주체들의 ‘재규정’을 통해 이뤄지는 것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 사회학자 더피(K.Duffy)는 ‘공동체는 좋은 것(Community is a Good Thing)’이라는 이 시대의 당연한 전제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정의의 모호함 및 단편적 이해로 인해 많은 프로젝트들이 실패에 이르렀음을 지적한 바 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이 시대의 참여를 통한 생산은 단순히 휴머니즘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의 복귀를 통해 이룰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구조적 요구와 범주를 다각적으로 해석해 실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구산동 도서관마을은 도서관이라는 물리적 결과물과 장소의 공공성이 여러 주체들의 지속적인 발생과 개입을 통해 이뤄졌다. 관과 건축가는 이에 참여하는 주민들을 단일한 속성으로 규정해 설정된 방식으로 개입시키기보다 건립 단계를 지나며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주민들 또한 완공될 도서관이 ‘우리의 장소’가 된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쳐 나갔으며, 이로써 점차 다양한 조직이 형성·운영·지속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지금 ‘이 곳’의 도서관에 남아있고, 일부는 이사를 가거나 새로운 주민이 합류하기도 하면서 ‘그 곳’의 공동체를 계속해서 형성해 나가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속가능한 공공성은 단지 ‘공동체가 참여했다’라는 사실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고 분화되며, 또 일부 소멸하고 합류하기도 하는 동태적이며 다층적인 공동체의 참여를 통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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