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임 /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

[속도를 사유하기] ④ 속도에 저항하기

‘속도에 저항’하려 해도 진정한 의미의 저항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다만, 속도에 저항하는 방법을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예술은 그 상상력의 자리에 위치하며 세계의 흐름에 제동을 건다. 이러한 상상적 저항의 방법론으로서 특유의 느린 리듬감을 지닌 ‘슬로우 시네마’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최수임, 〈차이밍량 ‘행자’ 시리즈에서의 시간에 관한 고찰〉, 《씨네포럼》 제23호’를 바탕으로 쓰였음을 밝혀둠.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속도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 ② 맑스주의와 속도 ③ 초연결사회와 속도 ④ 속도에 저항하기


슬로우 시네마가 속도에 저항하는 방법

최수임 /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

  슬로우 시네마(Slow Cinema, 느린 영화)로서 차이밍량(T.Ming-liang)의 ‘행자(Walker)’ 연작: 〈행자〉(2012)·〈서유〉(2014)·〈무무면〉(2015)에는 승려복을 입은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도시의 길을 걸으며 느리게, 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느리게 걷는다. 영화는 이 인물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문다. 슬로우 시네마는 속도에 저항하는 ‘행자(行者)’와 같다.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이미지를 통해 보는 이에게 느림을 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라 재프(I.Jaffe)는 《느린 영화들(Slow Movies)》(2014)에서 슬로우 시네마에 대해 “이 영화들은 시각적 스타일, 서술 구조, 주제적 내용과 인물들의 행동방식에 있어서 느리며…지연된 움직임과 길게 지속하는 정적 순간들 및 비어있음이 동시대의 슬로우 시네마를 판별한다.”고 말했다.

■ 출처: https://www.viennale.at/en/films/walker-0
■ 출처: https://www.viennale.at/en/films/walker-0

  슬로우 시네마가 뚜렷한 경향으로 파악된 것은 최근 십여 년 안팎의 일이다. 주로 2000년 이후 영화들로부터 축적된 하나의 양식을 가리키는 비평적 개념으로서 ‘슬로우 시네마’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전의 영화들이 모두 빨랐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대개의 영화들이 빨라지는 가운데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극단적인 슬로우 시네마들이 만들어짐으로써, 비로소 ‘느림(Slowness)’이 하나의 특이한 현상으로 인지됐음에 가깝다. 그러므로 동시대(Contemporary) 슬로우 시네마란 동시대 관객들이 ‘느리다고 느끼는’ 동시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느리다는 느낌’이라는 ‘속도의 주관성’은 슬로우 시네마의 범주를 명확히 규정함에 있어 문제로 여겨질지 몰라도, 슬로우 시네마가 속도에 저항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선 결정적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속도란 주관적이기 때문에 슬로우 시네마를 통해 관객들은 다른 속도의 감각에 물들 수 있고, 그럼으로써 현실 세계의 속도에 새로운 감각으로 대응하게 된다.


미학적 느림

  ‘이야기-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달려가는 움직임이 아닌, 사물과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대상을 성찰하는 영화가 슬로우 시네마라고 할 때, 근래 이러한 슬로우 시네마가 아트하우스 시네마에서 중요한 경향으로 떠오르는 것은 동시대인들의 정신적 욕구와 관련된다. 《느림에 관하여. 동시대적인 것의 미학을 향해(On Slowness. Toward an Aesthetic of the Contemporary)》(2014)에서 루츠 쾨프니크(L.Koepnick)는 ‘느림’을 현재 세계의 속도를 응시하는 동시대의 미학적 전략이자 동시대인의 안녕을 위한 예술적 제안으로 통찰한다. 쾨프니크는 “동시대의 속도는 공간적 관계들을 응축시킨다…속도의 지속적인 장소이탈(Displacement)의 논리는 우리의 현재성(Presentness), 현전(Presence)의 감각에 어마어마한 압박을 가한다.”고 동시대 속도를 진단한다. 그는 속도에 저항하기의 실천으로서 “현재를 미학적으로 느림의 양식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이러한 현재를 다중적 지속들, 과거들, 가능한 미래들로 충전된 하나의 자리로 접근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이를 ‘미학적 느림(Aesthetic Slowness)’이라 지칭한다.

  속도는 시공간적 예술 매체인 영화의 개별 작품들의 속성을 감지하는 중요한 요소다. 속도는 측정 가능하므로 객관적인 듯하지만 동시에 매우 주관적이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어떤 이는 느리지 않다고 느끼는 반면, 어떤 관객은 너무 느리다고 느낄 수 있다. 이라 재프는 짐 자무쉬(J.Jarmusch)의 〈천국보다 낯선〉(1984)을 슬로우 시네마의 선구자로 보며, 영화의 ‘장면 사이 암전과 쇼트 내 최소의 행동·대화·움직임’으로부터 슬로우 시네마적 특성을 찾는다. 2000년대 이후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지아 장커(J.Zhangke)의 〈스틸 라이프〉(2006)에선 ‘느린 패닝·텅 빈 화면·인물의 느린 성격’으로부터 슬로우 시네마로서의 속성을 찾고 있다. 그러나 속도란 주관적인 것이기에, 앞선 두 예시는 느린 리듬감을 지닌 영화에 익숙한 이들에겐 일반적인 빠르기의 영화로 기억될 수 있다. 즉 속도 감각은 유동적인 것이므로, ‘영화 보기’는 새로운 감각을 부여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 천국보다 낯선, 짐 자무쉬, 출처: IMDB
■ 천국보다 낯선, 짐 자무쉬, 출처: IMDB

 

■ 스틸 라이프, 지아 장커, 출처: IMDB
■ 스틸 라이프, 지아 장커, 출처: IMDB


걷는 사람

  무빙이미지를 감지하는 속도 감각은 ‘각자의 삶-움직임’이나 환경의 움직임을 느낄 때의 속도 감각과 무관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느린 도시 빈(Wien)에서의 유학 후 돌아와 느낀 서울의 빠름은 너무나 생경했다. 서울이라는 빠르고 가득 찬 도시에, 기적처럼 여백 같은 공원의 긴 산책로를 걸을 수 있는 것은 기쁨이다. 몸이나 마음이 늘 어딘가로 움직여 다니는 존재로서 우리는 ‘행자’이다. 어딘가로 움직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속도를 발생시킨다. 속도는 삶을 특징짓는 하나의 요소이자 삶을 살아가는 이를 작동하는 조종 레버와 같이 작용한다. 일하는 속도는 일하는 이의 몸에 리듬을 만든다. 그것이 감당할 만한 것이라면 춤 같은 몸짓이겠지만, 변신을 요하는 리듬-속도도 있다. 어떤 것은 행자를 성장시킬 수도, 어떤 것은 행자를 넘어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공원을 걷다 보면 운동 삼아 달리거나 빨리 걷는 사람만이 아니라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이들도 만난다. 그들은 ‘보통’ 속도를 요하는 바깥 길이 아닌 차나 자전거가 다니지 않는 보호구역 같은 공원 안길에 모여든다. 그곳은 또한 느리게 온 계절의 미묘한 기온과 습도에 따라 날마다 변신하는 풀들과 꽃들, 나무들, 수많은 작은 동물들이 자신의 속도로 매 순간 움직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날마다 그곳을 걸으면 그 느린 움직임들을 미세하게 분간해 볼 수 있다.

  〈행자〉·〈서유〉·〈무무면〉에서 주인공 승려의 걸음걸이는 너무 느린 나머지 많은 순간 멈춰 있는 듯 보인다. 주변 행인들과 사물들의 움직임이, 영화가 정지된 장면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카메라 역시 멈춤에 가까운 움직임을 고정된 채 응시한다. 따라서 빠른 속도를 강제 받는 현대인들에게 슬로우 시네마는 ‘느림’을 체험케 함으로써 상실된 현재를 되살린다.

■ 출처: https://www.viennale.at/en/films/walker-0
■ 출처: https://www.viennale.at/en/films/walker-0

  슬로우 시네마로서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은 영화 매체의 시간성을 실험한다. ‘행자’ 연작의 극단적 ‘느림’은 ‘움직이는 이미지’의 매체인 영화를 새롭게 느끼게 한다. 움직이는 이미지에 내재한 수많은 ‘정지된 이미지’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화를 ‘시간-지속의 체험’으로 감각하게 한다. 《1초에 24번의 죽음(Death 24x a Second)》(2006)에서 로라 멀비(L.Mulvey)는 “영화는 항상 자신의 주요한 패러독스, 즉 움직임과 정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상호 현존을 고찰하는 방식을 발견해왔다”고 고찰한다. 비정상적으로 느린 피사체를 보여주는 ‘행자’ 연작은 미세한 움직임도 민감하게 인지하도록 함으로써 빠르게 움직이는 현재 세계의 속도에 ‘한없이 정지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맞선다. 이렇게 관객은 삶의 현재를 순간순간 감각해 훈련한다.


느림을 보는 감각

  슬로우 시네마에서 속도에 저항하는 한 방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느리게 움직이는 존재들을 편집해 생략하거나 타임랩스로 압축하거나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지 않고 최대한 대상에 맞춰 보게 하는 것이다. 2010년대에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슬로우 시네마’ 경향인 ‘긴 영화’ 역시, 대상을 재단하지 않고 ‘오래도록’ 보게 한다. 라브 디아즈(L.Diaz)의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2016, 480분)나 〈악마의 계절〉(2018, 234분)은 느리면서도 긴 슬로우 시네마 계열의 한 정점을 찍는 최근작이다. 슬로우 시네마는 느림을 보는 감각을 가르친다. 빠른 세상 속 느린 존재들의 움직임을 봄으로써, 그 ‘봄’을 통해 그들과 함께하며 세상의 속도에 저항하게 해준다. 느린 이들 역시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있는 ‘보통의’ 존재들임을 인지하고 경이롭게 여길 수 있도록 한다.

  ‘1초에 24번의 죽음’을 통해 ‘삶-움직임’을 마술처럼 만드는 사진적 영상 매체인 영화가 스스로 눈에 띄게 느려졌다. 슬로우 시네마는 이 같은 방법으로 현재 사회의 빠름에 저항하고 있다. 빠르고 역동적인 여기의 도시-지금의 사회에서, 느린 존재들의 움직임을 보는 시각은 소외되기 쉬운 느린 존재로서 누구나의 삶을 새롭게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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