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필 / 국어국문학과 박사

인터뷰

의식에서 그림자로, 다시 참여시로


■ 〈‘난해’의 장막〉에서 김수영이 전봉건의 시론을 비판한 이유는

  김수영이 문제 삼은 것은 ‘양심이 부재된 기술’이다. 따라서 김수영은 기술만을 중시한 난해한 작품들을 비판하게 된다. 이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글이 전봉건이 쓴 〈한국어와 리리시즘〉과 〈환상과 상처〉(1964)다. 김수영에게 ‘양심’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진 사회에 서식하고 있는 시인 자신의 뒤떨어진 모습을 인정하는 태도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봉건의 시론은, 김수영에게 양심이 부재된 허술하고 책임 없는 시론에 불과했다. 그에게 당대의 시인들은 자신만이 위대하다고 믿으며,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했다.


■ ‘증인부재 도식’은 ‘온몸의 시학’과 흡사하다고 했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 적혀진 김수영의 문구로 답을 대신하고 싶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 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증인부재 도식은 김수영의 참여시론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증인부재 도식’은 세 가지 속성을 품고 있다. 이 속성은 개별적인 주체에게 기계적인 장 역할을 한다. 이 기계를 수용한 주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사회와 호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 사회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가령 정직한 생활의 내면화를 훈련하는 시인이 바라보는 사회와, 정직한 생활의 내면화가 불가능한 시인이 바라보는 사회는 다르다. 다시 말해,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시인과 그렇지 못한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엄연히 다르다. 또한 훈련으로 시적 기술의 사라짐을 터득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르다. 무의식적으로 시 쓰기를 즐기는 시인과 애쓰는 시인은 다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즐긴다’는 말은 애쓰는 것을 통과한 후의 즐거움이다. 더 나아가 타자의 욕망에 휘둘리는 시인과, 그렇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시인은 다르다. 이러한 태도를 내재한 상태에서 주체는 자신이 살아온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단단한 참여시를 생각할 수 있다.


■ 김수영은 왜 ‘증인부재 도식’ 이론에 주목했는가

  김수영은 프로이트 이론을 모던한 것으로 믿었다. 〈생활 현실과 시〉(1964)는 현실의 반영이 중요하다고 보는 평론가 장일우와 기술과 서술 모두가 중요하다고 보는 김수영 사이의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김수영은 시의 기술만을 신경 쓰는 시인은 언어의 기술만 염두에 두기 때문에 사이비 난해시가 되기 쉽고, 언어의 서술만을 신경 쓰는 시인은 언어의 기술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에 실패한 프롤레타리아 시가 된다고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김수영은 대안의 형태로 ‘프로이트적인 요소’를 언급한다. 김수영은 해당 글에서 “일본의 시만 보더라도 프로이트적인 요소를 상당히 도입한 모던한 것으로 돼 있는 것을 볼 때, 그만한 것이라면 한국에서도 어떻게 우물쭈물 흉내를 낼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도 같은데”라고 적는다. 박인환을 통한 초현실주의와도 교류했던 김수영은 또 다른 글에서 “프로이트를 읽어 보지도 않고 모더니스트들을 추종하기에 바빴던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을 너의 그 말을 해석하려고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김수영에게 프로이트 이론은 모더니즘에 대한 추종으로서 우연히 접하게 된 것에 가깝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 이론을 창조적으로 오독해 자신의 시론을 구축했다. 따라서 ‘증인부재 도식’이 돌출된 것은 우연과 부분이 전체를 관통한 것이다. 일반적이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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