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 사회학 연구자

['20대 개새끼' 부터 'N포'까지, 세대론 10년]

  ‘청년’은 지난 10년 동안 ‘사회적 현상’을 진단하기 위해 가장 많이 호출된 단어일 것이다. 동 기간 동안 ‘청년’은 “88만원”“3포”“달관”이 그렇듯 주로 ‘경제적 약자’로서 그려졌다. 물론, 정치적 차원에서도 보수정권 집권의 원인을 귀책하거나(“20대 개새끼론”), 리버럴의 당선(‘청년의 승리’)을 예찬하기 위해 ‘청년’이 필요했다. 모든 것이 세대로 설명됐다. 이 같은 세대 개념의 남용이 지닌 위험성과, 그럼에도 사회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유용성은 무엇인지, 지난 10년간의 세대론이 무엇을 남겼는지 다시금 톺아보자.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계급’을 지우는 청년세대론 ② ‘젠더’를 지우는 청년세대론 ③ ‘청년논객’ 담론 갈무리 ④ 불리는 ‘세대’, 말하는 ‘세대’

청년은 없다: 오인된 청년주체·청년담론

 

김정환 / 사회학 연구자

  나는 어쩌다가 청년을 연구하게 됐을까하고 돌아보니 그 시작점은 2014년 ‘20대들의 불안’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프로젝트를 우연히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내가 천착했던 키워드는 ‘불안’이었다. 아마도 2000년대부터 청년들을 관통하는 공통감정을 불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 남들보다 뒤쳐진 것 같은 초조함 그리고 엄습해오는 무력감과 자괴감, 이런 것들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어떻게’ 경험되는 것일까.

  거시-구조적 관점에서 ‘어디서’라는 대답은 비교적 명확하다. 대학교육의 보편화에 따라 청년 노동력은 급격히 고학력화 돼 이전보다 많은 청년들이 대학 학위에 걸맞은 직업을 갖기를 원하게 된 반면, 경제위기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고용 없는 성장으로 안정적이고, 그럴듯한 일자리는 점점 줄어 다수의 청년이 불가피하게 잉여가 될 수밖에 없는, 노동 수요와 공급에서의 비극적인 미스매칭이 초래됐기 때문이다.

  이 구조적 불안을 각 청년개인들이 ‘어떻게’ 경험하는지는 거시-구조적인 측면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굳이 명명하자면 이는 사회심리학적 혹은 문화사회학적 문제에 속하는 것이다. 나와 공동연구자 한분으로 이뤄진 우리 연구팀은 계급적으로 상이한 각 청년집단들은 다수가 잉여가 될 수밖에 없는 후기자본주의 상황 속에서 불안과 불확실성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들의 생애과정에서 형성된 감정동학을 통해 이를 포착하려 했다.

 

 

ⓒ<고함20>, 페르마타

 

 

‘청년세대론’에서 가려진 계급에 따른 감정동학

  잉여라는 자조적 자기호명 속에는 ‘잉여가 되면 안 된다’는 사회적 명령이 전제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무나 잉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빈곤계층 청년과 중간계급 청년과의 비교에서 이것이 잘 드러나는데, 요약하자면 스스로 잉여로 호명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빈곤계층 청년들은 생계를 위해 청소년 시기부터 일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집안환경이나 부모로부터 직·간접적인 압박을 받는다. 또한 이들 중 상당수는 등록금 대출을 받고 있으며, 생활비를 비롯한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학업보다 아르바이트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쉽게 말해 이들은 강제적으로 ‘갓수’ 혹은 잉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간계급 청년들 중 대부분은 등록금 문제로 대출을 받거나 스스로 벌어서 지급했던 경험이 없었다. 대학생활 내내 등록금이나 생활비는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일부 청년들만이 자신의 용돈벌이와 해외여행 등 여가 및 소비생활을 위한 목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또한 인터뷰했던 중간계급 청년들은 상당기간 취업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층계급 청년들처럼 당장의 생계를 위해 열악한 노동시장에는 진입할 생각이 없었으며, 오히려 공무원 시험이나 임용고시, 취업 준비, 어학 교육, 재취업 교육 등 부모의 지원 혹은 권유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스펙을 쌓거나 다른 진로를 모색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즉, 이들은 잉여가 되는 것이 가능했다.

  특히 중간계급 청년들의 경우, 후기자본주의적 불확실성이 어떻게 체제순응적인 태도로 굴절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간계급 청년들은 감정동학과 생애전략에서 이중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사회의 규준이나 타인의 시선을 자신의 행동의 중요한 규준으로 고려하면서도, 사회가 자신을 책임질 것이라는 사회에 대한 믿음이나 타인과의 연대 가능성 대한 회의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지향 속에서 (체제의 통치와 연관된) 사회규범은 존재하나 사회적 연대감은 희박하다. 사회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나 없이도 이미 완벽한 것’)이며 자신이 적응해야 하는 곳이지, 자신의 고양을 이루거나 타인들과의 연합을 통해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단순히 무기력한 존재라거나 일탈적인 존재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규범적이다. 이들은 (객관적인 실제라기보다는 이들의 주관적인 인식 속에서는) 사회가 요구했던 정규적 생애과정 안에서 하라는 대로 행동했음에도 그곳에서 밀려났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학 이전에는 강렬히 희망했던, 자신이 사회 안에서 직업적으로 인정받고 정규적 생애과정을 수행했다는 인증을 받는 욕망을 단념하게 된다. 동시에 기존 규범의 내용(정규적 생애과정=정상주체라는 도식)을 적극적으로 오인해가면서까지 자신들이 체제의 규범 안에 있다는 내면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새로운 유형의 순응적인 주체들인 것이다.

‘청년세대’는 어떻게 연구돼야 할까

  다시 나의 연구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면, 한켠에는 기존 청년 연구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2000년대 이후부터 범람하던 무수한 청년담론들과 진단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나와 주변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삶의 문제들을 충분히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수도권 신도시에서, 중산층 부모 밑에서 자랐던 ‘우리’는 삶의 의지가 충만한 박카스 광고 속 멋진 청년도, 꿈을 향해 나아가지만 착취 받는 열정청년도, 그렇다고 방에만 처박혀 있는 무기력한 잉여인간도, 남을 비하하면서 사는 일베 청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청년이라는 일상적이고도 상식적인 개념은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사회과학적 범주라기보다는 실상 다양하고 이질적인 복수의 청년들을 하나의 범주로 몰아넣는 이데올로기적 범주에 가깝다는 것이다. 즉, 우리(혹은 당신 혹은 내)가 청년임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하지 않은 것을 어째서 우리는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었을까. 좀 더 분석적으로 청년을 보면, 청년은 유아기-아동기-청소년-성인기-노년기로 이어지는 생애과정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개념이기도하며,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이들은 비슷한 특성을 가질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세대사회학적 개념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이러한 청년 개념의 물적인 토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어렸을 때 유치원을 가고, 청소년기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성인이 돼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사실 근대 이후에 비로소 보편화 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근대 이전에는 신분별로 상이한 생애과정들이 존재했던데 반해, 근대 이후 국민국가가 제동하는 안정적인 제도적·문화적 기반 아래서 교육-일-은퇴로 대표되는 이른바 ‘표준적 생애과정’이 등장한 것이다. 이 근대의 산물인 표준적 생애과정은 예상가능하고 선형적인 특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근대 이후 대다수의 사람들이 표준적인 제도 하에 놓이게 되면서 세대 내 동질성이 증가하고 코호트(Cohort)와 세대, 연령 같은 개념의 설명력이 유효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후기자본주의, 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시작된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급격히 제도적 안정성이 저하됨에 따라 기존의 표준화된 생애과정은 약화됐다. 이는 근대의 결과인 세대내 동질성이 약화되고 이질성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이것을 다시 서술하면, 계급양극화 혹은 중산층의 몰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세대론을 작동시킬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침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존의 청년 담론이나 연구는 이러한 고려가 충분히 되지 않고, 근대적 세대 개념의 패러다임 속에 머물면서 청년 내부의 계급 차보다는 다른 세대와 현 세대인 청년의 차이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지속돼 온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의 청년이라는 담론공간은 실제 청년의 삶을 반영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상징투쟁의 장이다. 심지어 그 투쟁의 콜로세움에는 청년이 배제돼 있다. 청년이라는 기표는 현재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들의 축적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들이 부과한 당위적 명령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기존의 세대를 말하는 청년연구들은 청년들을 담아내기보다는 규정해왔다. 청년 내의 계층별 상이성, 사회적 범주에 따른 차이가 있음에도 청년이라는 단일한 범주로 묶어버리게 되면, 청년이라는 단어의 다의성만 증폭되고 청년을 어떠한 이론에 대입해도 다 설명되는, 동시에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는 마법의 연구대상이 돼버린다. 경험연구의 역할은 선험적 모델을 단순 적용하는 것 그 이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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