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으로 살아남기>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름값 하고 산다는 무게

  “이름값 한다”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명성이 높은 만큼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명성’은 무엇인가. 세상에 널리 퍼져 평판 높은 이름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사회는 세상에 널리 퍼지지도, 평판이 높지도 않은 이름에도 ‘이름값’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은 너무나 많다. ‘나’에게 붙은 고유명사 하나, 그리고 세상이 붙여준 수많은 이름이 있다. 우리는 그 이름들에 따라 규정되고, 특정한 역할을 하도록 기대받는다. 국적, 성별, 나이, 세대, 직업, 소득 수준…. 셀 수 없이 많은 기준들로 분류돼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옷을 입는다.

  ‘대학원생’이라는 이름역시 그렇다. 학업을 이어나가기 위해 조교노동, 간사 노동 등 각종 업무를 떠안고, 그 업무로 학업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대학원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 넘어가곤 한다. 오히려 조금 여유로운 대학원생에게는 ‘대학원생답지 않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이름값이 아닐 수 없다.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아다오

  이름도 많고 그에 따른 의무도 많은 우리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지는 이름 뒤에 남는다. 이름답게 살기를 요구받고, 이름답게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것이라 여겨진다. 심지어 이름을 두고 각자의 편견에 맞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하기도 한다. 사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답지 않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아이가 돈가스를 먹는 것을 보고 이를 사회복지센터에 신고한 사람마저 있었다.

  잘살아 보겠다는 노력마저 이름이 돼 돌아오는 지금이다. 위험을 선택해 볼 시간도, 투자할 비용도 없는 2018년 현대인들의 소비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작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워라밸(Work-Life-Balance) 세대’라는 이름이 붙는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지 관심 없다면,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아다오.”

 

대학원생, 연구자, 학문 후속 세대

  학생이자, 연구자라는 이름표를 단 우리들은 생존을 위한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특집면에서는 ‘학문 후속 세대’로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그 길을 바라보고자 했다. 먼저 8면에는 ‘가짜 학술지’라 불리는 와셋(WASET, World Academy of Science, Engineering and Technology)을 취재한 <뉴스타파> 인터뷰가 실렸다. 대학과 연구 성과가 ‘얼마나 많은 양을 만들어 냈는가’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그리고 좋은 평가가 생존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바로 옆인 9면에는 ‘가짜’라고 낙인이 찍힌 학회와 학술지들에 대한 특별한 시선을 실었다. 와셋이 가짜라고? 그럼 무엇이 진짜인가. 《대학의 기업화》(2018)의 저자이기도 한 필자의 이 글은 돈이 곧 가치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짜 문제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11면에는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과의 인터뷰를 실었다. 기존 대학이라는 테두리 밖에서, 소속된 곳 없이 연구하는 독립연구자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그들이 제도권 학계에서 벗어나 독립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삶을 조명해보며 학생으로서 또 연구자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자 한다.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 우리가 붙인 이름

  특집 기획으로는 먼저 ‘세대론’을 살펴본다. 우리는 종종 ‘청년’이라는 단어로 묶여 하나로 취급돼 왔다. 정부에서는 시·도 단위로 앞다퉈 ‘청년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대학원생이라는 이유로 청년 정책의 대상에서 제외될 때면, 대체 사회가 말하는 청년이 누구인지 의문이 든다. 이렇게 생애를 잘라 이름을 붙인 세대론이 무엇을 남겼는지 지난 10년을 돌아본다.

  다음으로 특집 사회면에서는 세계화된 시대를 살며 국적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우리를 고민해본다. 언젠가 바뀔 수도 있는 국적이지만 바꾸고 싶다고 해서 쉽게 바꿀 수는 없는 이름이다. ‘한국인’으로서 혹은 한국인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남고 살아가야 할까. 우리가 청년으로 묶여버렸듯이 수많은 개인을 손쉽게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리려 하지는 않았는가.

  마지막 특집 기획으로 죽음을 다룬다. ‘자살 공화국’ ‘헬 조선’ 등 한국이라는 나라에는 행복한 나라로는 보이지 않는 별명이 붙었다. OECD 가입국 중 13년동안 자살률이 1위였던 나라, 노동생산성은 낮고 노동 투입은 높은 나라에서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더 잘살아 보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으로써 한국과 죽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선택해서 얻은 이름이든, 저절로 얻어진 이름이든. 우리를 규정하는 수많은 이름 아래에서 2018년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2018년 하반기 특집호에서는 <“ ”으로 살아남기>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붙여진 이름과 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정유진 편집위원|_hegel@daum.net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