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선 /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폭력과 비폭력의 세계 속, 상류의 위치

- 황정은 소설 <상류엔 맹금류>에 대해 -


이은선 /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우리는 때때로 폭력을 외면하거나 가담하는 방식으로 가해자가 된다.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어쩔 수 없다는 자기 위안을 하면서. 황정은의 소설 <상류엔 맹금류(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속 사건들은 정물처럼 놓여있다. 인물들의 주변을 돌며 서사가 펼쳐지고 여백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발화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묻는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지. 윤리성과 비윤리성은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인지.

  <상류엔 맹금류>는 ‘나’가 헤어진 애인 ‘제희’와 그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진행된다. ‘제희’네 가족은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해가며 살아간다. 한숨을 돌릴 무렵, 폐암을 진단받은 아버지의 ‘근사한 곳’에 가보고 싶다는 바람에 따라 수목원으로 소풍을 하러 간다. 비이상(非理想)적인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순간에서야,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꾸며낸다. ‘나’는 함께 가자는 제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나’는 유토피아로 대체될 수 있는 세계(수목원)에서 ‘제희’와 그의 가족들을 보며 느끼는 답답함을 풀어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의 관람이 수월하지는 않다. 신분증을 놓고 오고, 무거운 짐들을 나르다 발목을 다친다. 잦은 실수 속 예민해진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인물들을 따라 다닐 뿐이다. 그래야만 폭력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제희의 가족에게 다가온 폭력적인 세계에서 ‘나’는 유일하게 그 속에서 벗어나 비폭력의 입장에 서 있는 인물이다. ‘나’는 폭력의 세계에서 방관자이자, 세계 바깥에서 바라보는 외부인이 된다.

  끊임없는 불화 속에서 그들이 몸을 앉힐 수 있는 곳은 ‘근사한 곳’이 아닌 진입이 금지된 비탈길이다. 마치 그들이 절대 상류의 세계로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비탈길에 도착해서야 나는 조용히 읊조린다. ‘여기는… 안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라고. 외면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나’가 그들이 마신 물에 대해 ‘저 물이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라고 발화하는 순간. ‘나’는 폭력의 세계로의 첫 진입을 하게 된다.

  ‘나’는 결국 ‘제희’와 이별한다. 수목원 일이 있고 2년쯤 지난 후다. 어떤 이유로 헤어졌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수목원의 일만큼은 생생하다. ‘제희의 가족’과 ‘나’의 관계는 끝이 났지만, ‘나’는 일종의 죄책감을 느낀다. 수목원에서 참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소리치고 말았을 때. 그들이 안간힘을 써 만들어냈던 상류의 낭만을 ‘나’의 손으로 부쉈을 때. 그들이 모른 척하던 현실로 그들을 끌어냈을 때. ‘나’가 발화한 ‘비윤리’적인 행위의 고발은, 그들에게 있어선 ‘폭력’으로 되돌아간다.

  비폭력과 폭력의 경계가 흐트러지는 지점에 황정은의 소설이 있다. 침묵하던 ‘나’가 생동성을 강요받았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별이다. 이별이 비윤리적 행위일지라도, 폭력에 동참 하는 것보다는 그 세계에서 벗어난 외부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이란 물질적인 폭력이 아니다. ‘내’가 느끼고 있는 비도덕적 행위를 폭력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폭력을 마주함에 있어 개인을 지우고 사건을 앞세운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온 폭력적 상황, 또는 자신이 행한 비윤리적 행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넘기고 싶어 한다. 소설 속 ‘나’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누구도 소설 속 ‘나’를 비난할 수는 없다.

  받아들일 수가 없는 폭력의 세계에서, 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으며 폭력을 관조할 수밖에 없다. 비윤리적 세계를 벌한다고 말하기 전에 무엇이 비윤리적이라 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이따금 곱씹듯 그날들을 떠올릴 뿐이다. 결국 이렇게 붕괴하는 공간에선 절대적 상류의 위치에 아무도 가닿을 수 없다. 물이 흘러 상류와 하류가 맞닿게 되듯, 폭력과 비폭력도 섞여가며 맞닿는 세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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