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18.11.7 수 13:35
특집
[사회] 우리가 욕망하는 '다문화'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오경석/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소장
김유중 편집위원  |  yuri3956@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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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호]
승인 2018.09.04  12: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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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_다문화사회] ① 다문화사회와 이데올로기

  대한민국은 다문화사회로 진입하는 길목에 서 있다. 국제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외국인 인구의 증가폭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다문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사회 곳곳에서 난민법 개정, 외국인 인권 등 관련 이슈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다문화 담론을 시작할 시기다. 이번 기획에서는 국내·외 다문화 관련 이슈와 담론을 살펴보고 다문화 정책의 방향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다문화사회와 이데올로기 ② 다문화주의와 국제이슈 ③ 외국인 인권 실태 ④ 다문화사회로 가는 길


우리가 욕망하는 ‘다문화’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오경석 /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 소장

  주지하다시피 다문화주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것은 근대 체제의 경쟁적인 진영 양자 모두에 의해 공통적으로 억압됐던 ‘차이의 담론’을 주류화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치적 기획으로 추앙받는다. 반면 문화적 소수자들을 타자의 지위로 고착시키는, 절대적이고 교묘한 인종주의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소수자 권리 담론을 국제화시켰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진보로 평가되기도 하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문화적 상부 구조로 폄하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해 보인다. 단일 민족, 단일 문화로 압축되던, 동질화의 압력이 예외적으로 강한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삶에 다문화주의가 끼친 파급력은 결코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민자 및 국제결혼가족으로 대변되는 에쓰닉(Ethnic) 소수자들의 위상에 대한 재개념화가 시도됐다. 믿기 어렵겠지만 다문화주의가 도입되기 직전까지 한국의 국제결혼가정 구성원들은 ‘의사(意思) 장애인’으로 간주됐다.

  그랬던 한국 사회에서 다른 존재와 ‘다른’ 문화가 공인되고, 인권·제도·생활세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 그들-‘다른 존재’들-을 사회구성원으로 포섭할 수 있는 방식이 토론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열리고 있다. 초보적이고 논쟁적인 수준이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있을 법 하지 않은’ 놀라운 진보가 아닐 수 없다.

 

 다문화사회를 맞이하는 한국의 두 얼굴

  올해부터 향후 5년간 시행되는 정부 외국인 정책 전체를 아우르는 ‘비전’은 “인권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안전한 대한민국”이다. 다문화가족정책기본계획의 첫 번째 목표 역시 “모두가 존중받는 차별없는 다문화사회의 구현”이다. 그러나 볼멘소리들도 만만치 않다. 후발 이민국가로 분류되는 한국 사회에 다문화주의가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이제 10여 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에 대한 비판과, 비판을 넘어서는 거부감이 원색적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그 가운데에는 ‘다문화’라는 용어 자체를 폐기하거나 금기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포함된다.

  2015년 국민의 다문화 수용성 조사 결과는 다문화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양가적인 태도를 보다 분석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다. ‘다문화 수용성’이란 타 문화에 대해 편견과 차등을 두지 않고, 상호인정과 공존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세계시민으로서의 태도를 뜻한다. 2015년의 다문화 수용성 지수는 53.95점으로 2011년의 51.17점에 비해서 미미하지만 향상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다문화 수용성의 작은 진보 속에서 ‘여러 형태의 양가성’이 관측됐다는 점이다. 교류 및 세계시민행동 분야의 수용성은 높아졌으나 문화개방성 및 일방적 동화기대 요소의 수용성은 낮은 양상을 보였다. 국민의 자격과 관련, 시민적 덕목과 혈통에 대한 강조 역시 유지되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다문화 수용성을 구성하는 8가지 요소들 가운데 2011년에 비해 유일하게 낮아진 분야가 ‘일방적 동화 기대’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담론이 확산되는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이주민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관습을 일방적으로 따를 것을 요청하는 압력 역시 강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굳이 2015년의 조사가 아니더라도 다문화를 대하는 그리고 다문화를 써가는 우리 사회의 복잡하고 양가적인 욕망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매우 많다. 우선 다양성 혹은 차이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이다. 이 경우 차이는 동일시의 대상, 혹은 극복이나 계몽의 대상으로만 허용된다. 일부 지자체들이 ‘모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다문화 대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문화 대상’의 공적 조서(功績調書)에는 거의 대동소이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한국 음식, 노래 그리고 한국 영화도 좋아하는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적 정서를 가지고 있음.”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 사람같은 사람이, 다문화사회를 대변하는 수상자로 선정되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다문화는, 그리고 다문화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한국 사람 다 됐네!”라는 감탄사로 귀결된다. ‘차별방지와 문화다양성 존중’을 위해 ‘외국인주민 전통문화 체험’이 기획되고, ‘외국인주민 대상 한복대여 사업’이 실시되는 것은 너무나도 정당한 일이 된다.

  경우에 따라 차이는 절대화되기도 한다. 이 경우 차이는 죽음으로조차도 해소될 수 없는 생물학적 요소로까지 격상된다(차이를 절대화하는 것을 우리는 차별이라 알고 있다). 이를테면 국가가 공표하는 ‘다문화 사망률’이라는 통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분류하는 ‘다문화 사망자’ 가운데는 ‘귀화 한국인’이 포함된다. 귀화 한국인, 곧 국적취득자는 법적으로 완전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우리나라 사망률’에 포함되지 않고, ‘다문화 사망률’로 별도로 관리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 사람 같은 한국 사람이 되고, 또 다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국적취득자가 된다 해도, 그에게 실질적인 한국인의 지위는 살아있는 동안만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셈이다. ‘국민’으로 살았으나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니라 ‘다문화’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다. 다문화 자녀, 다문화 아동 및 청소년, 다문화 대학생, 다문화 청년, 다문화 장병, 다문화 직장인, 다문화 부모 그리고 다문화 사망자. 이 경우 다문화는 차이를 절대화함으로써 상호교류와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누군가의 전생애를 억압하고 제한하는, 저항할 수 없는 차별의 굴레가 된다.

   
 

다문화사회를 향한 왜곡된 꿈

  우리의 다문화 속에서 차이는 이처럼 문화적 층위에서 거부되거나 혈통적 영역에서 절대화된다. 그것은 다문화 담론과 실천을 통해서 삶의 다양성이 장려되고 활성화되는 대신 오히려 그 반대의 압력과 경향성이 강화되고 있을 수 있음을 뜻한다. 일견 부조리하며 일견 매우 사악해보이는 이러한 역설은, 어떻게 우리를 설득시키거나 혹은 현혹시킬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일류에의 꿈’, 보다 정확히 “일류국가에의 꿈”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이주민 정책 전체의 얼개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외국인 정책 기본계획의 슬로건은 “외국인과 함께하는 세계일류국가”였다. 세계일류국가가 다문화사회의 공식적인 비전으로 제시된 후 그것은 두 가지 하위 버전으로 분화한다. ‘좋은’ 국민(민족)론과 발전주의 국가론이 그것이다. 전자는 다문화사회의 정당성과 이주민 소수자들의 인권 보호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것이 “문명화된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키고 “나쁜 국민으로 오인”되지 않기 위해 요청되는 불가결한 과제들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발전론적 국가주의 담론의 기조는 “한국(인)의 도덕적 근대화와 세계화”로 모아진다. 도덕적 근대화와 세계화를 위해 다문화는 필요불가결하다. 이주민의 국가 발전에의 기여 여부에 대한 평가는 상반될 수 있다. 그러나 이주민에 대한 친화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의 차이와 관계없이 ‘발전주의적 수치심’을 회피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로서 다문화주의가 동원되고 있다는 점에는 공통적이다. 이 경우 차이는 서열이 된다. 경쟁에 뒤쳐진 열등한 타자를 향한 최선의(덜 수치스러운) 자세는 ‘연민과 온정’이다. 한국의 주류 다문화 담론은 ‘나눔과 봉사’로 가득 차 있다. 과도한 연민과 온정이 때때로 무례한 폭력에 둔감해지거나 혹은 그를 정당화하는 기제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어느 포럼에서 정부 관계자는 국제 결혼 가정 구성원의 체류권 유지를 위한 조치와 관련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제 결혼 가정(곧 다문화 가정) 결혼의 진정성이 관건인데요. 결혼의 진정성을 파악하는 지표는 임신과 출산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가정 방문을 통해 동거 여부, 자녀가 없는 이유 등을 조사합니다.”

  다문화를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다양성과 차이의 사회적, 문화적 지형은 생각보다 낙관적인 것 같지는 않다. 다문화 담론의 과잉과 남용 속에서도 차이는 거부되거나 절대화되며, 사회 전체의 다양성의 목록이 오히려 국가(국민)주의로 축소되는 경향마저 관측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급히 좌절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욕망의 민낯, 곧 우리와 다른 것, 그리고 우리 스스로 다른 것이 되는 것에 대한 의욕과 두려움, 도전과 회피, 환호와 거부 등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문화의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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