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선 / 철학자

[페미니즘_‘여성’이 아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

  대한민국은 여성 혐오와 전쟁 중이다. 오래 쌓여 견고해진 가부장적 여성 혐오에,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공포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여성 혐오가 가세했다. 여전히 여성들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지식 노동자를 꿈꾸는 대학원생으로서, 인권운동인 페미니즘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에 본 지면에서는 대한민국 페미니즘에 대해 다양한 방면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언어와 페미니즘 ②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위인들 ③ 여성 몸의 해방과 주체성 회복 ④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

‘여성의 타자화’의 메커니즘 해부도

윤지선 / 철학자

  매끈한 전신의 굴곡을 따라 거미줄처럼 조밀하고 기하학적으로 엮인, 밧줄 매듭으로 온통 결박당한 채 무기력한 시선을 내던지는, 아라키 노부요시(N.Araki)의 논쟁적 사진 속 피사체로서의 여성들. 남성 욕망의 시선이 관통하고 분할하고 침습하는 여성의 신체는, 스스로의 언어를 봉합당한 채 즐비하게 전시돼 있다. 이 글은 각종 미디어와 예술, 법률, 학문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정교하게 구축돼온 여성의 타자화의 메커니즘과 그 기원을 밝히고자 한다. 또 인간의 인식구조와 대상화, 위계적 타자화 방식을 고찰하고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욕망구조, 시각적 재현물(Representations)들의 상호 관계성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해 보기로 하겠다.

‘여성의 타자화’의 메커니즘과 인식론적 구조의 연관성

  ‘남성의 시선에 의한 여성의 타자화’란 용어에 대한 철학적 기원을 이해하려면 우선 인간의 인식론적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간주체는 자신의 정신 앞에 놓인 세계를 ‘대상(Object)’으로 인식하고 그로부터 앎(知)을 구성해내며 역사와 문화, 과학과 학문을 이룩해 왔다. 하지만 근원적 의미에서 이 세계는 인간 정신이 온전히 포섭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자 규정성을 넘어서는, 그 자체로 과잉인 어떤 것(Thing, Ding)이라면, 인간주체는 이 미규정적 사물 X를 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규정하고 한정 지으며 그것을 소위 ‘알 수 있는 대상’으로 변환시킨다. 다시 말해 ‘대상화(Objectivation)’란 인간의 인식구조-‘주체-대상-지식’-의 필연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대상(Ob-ject)이란 라틴어로는 Objectum으로, 접두사 ob-는 ‘〜앞에’, Jectum는 ‘내던져진 것’이다. 이는 주체(Subject)의 의식과 시선 아래에 내던져져 포섭되고 규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주체는 미지의 사물 X를 자신의 의식을 통해 그것의 속성들(Properties)을 규정짓고 정의하며 비로소 그것을 앎의 대상 A로 변환시키는 작업에 일차적으로 돌입하게 된다. 그런 다음 그러한 규정 대상 A의 의미를 보다 더 정련하고 명료히 밝히고자 A와 대립되는-A(타자)(성창기, 2012)와의 원천적 구별과 위계적 차등관계 등을 제시해 비로소 앎의 대상에 대한 인간주체의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보부와르(S.Beauvoir)는 이와 같은 헤겔적 인식구조, 즉 A(thesis)와 -A(antithesis) 간의 상호대립과 상호규정의 변증법적 관계를 바탕으로, 남성주체(A)라는 항과 타자로서의 여성(-A)이라는 항 간에 놓인 비대칭적이며 밀접한 상호규정적인 권력관계를 밝혀내고자 했다. 인식구조의 메커니즘 내에서 남성주체(A)는 보편적 인간성, 객관성, 주체성, 정신성, 강자성, 능동성 등의 속성들로 이뤄진 것으로 규정된다. 반면 이 상위항의 의미를 보다 더 명료히 구분하고 드러내기 위해 타자로서의 여성(-A, antithesis) 항은 남성성의 결핍소로서 불러내지며 특수성과 주관성, 의존성, 육체성, 약자성, 수동성의 속성들로 대별시키며 위계적으로 차등 배치된다. 그리하여 오랜 기간 여성들에게 여성성의 근본적 속성이라는 이름으로, 육체적 관능성과 의존성의 프레임을 덧씌우는 근거로 공고히 작동해 왔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남성이 스스로의 존재론적인 허약성(의구심, 불확실성, 불안)을 감추고 자신을 확고한 주체로 정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원천적으로 대별되는 것들과의 경계를 확정짓고 그것(-A)을 자신의 바깥에 있는 성질(결핍과 부정, 열등성)의 것으로 규정하고 온전히 밀어내는 것을 통해, ‘진정한 남성(Real Man)’이라는 사회적이고 성적인 규범성(Normativity)에 더 적절하게 응답하고자 하는 기획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진짜 사나이들의 연대라는 문화(군대, 조직문화 등) 속에서 여성에 대한 음담패설과 성적 대상화는 ‘누가 진짜 남자가 아닌가?’라는 질문의 표적에 자신이 아닌 다른 자들을 소환하고 조롱, 모욕함으로써 자신은 남성성 규범에서 결코 열외되지 않는 존재임을 확증받기 위한 것이다. 위와 같은 인간주체의 인식구조 작동방식을 통해, 대상화와 타자화가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봤다. 이것이 다양한 시각적 재현문화와 욕망의 구조와 어떠한 층위에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지 분석해보도록 하자.

Res extensa, 사물의 세계로 편입된 여성-신체

  보부아르는 기존의 인식담론에서 여성은 오로지 ‘남성-정신성’의 대립항이자 타자로서 존립하기에, ‘여성-육체성’라는 반대표식으로만 환원되고 인식될 뿐이라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남성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 속 피사체로서의 여성들은 나신으로 온통 결박된 채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거나 바닥에 엎어진 포즈로 육체적 관능미를 전시하고 있다. 노부요시는 카메라를 ‘카마라’(일본어로 ‘마라’는 남근을 뜻한다)라고 부르길 서슴없이 즐기며, 여성이라는 미규정적 타자 X를 자신의 ‘페니스-렌즈’의 특정시선을 통해 포섭하고 규정지어놓은, 성적 대상물 a란 이미지로 변환시켜 그것을 반복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여성에 대한 가학적이고 과잉성애화된 이미지들은 남성들이 여성을 그들의 기억, 지각, 관념, 상상, 의지, 욕망 등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주관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재현(Re-presentation)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우리에게 미규정적 타자 X(Thing)가 외부적으로, 직접 현시돼(Present) 있을 때 인간주체는 의식의 프리즘을 통해 그것을 새로이 재구성해 주관적이며 간접적으로 재-현해내는(Re-present) 표상체계를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남성주체가 자신의 기억, 의지, 관념, 상상, 욕망이라는 표상체계를 통해 구성한, 여성에 관한 그 수많은 재현물들(영화, 문학, 미술, 사진, 포르노그래피, 음담패설, 여성에 관한 경험담)에는 애초에 여성이란 존재는 없었던 것이다.

 

프리다 칼로, <상처 입은 사슴>, 1946, 캔버스에 유채
프리다 칼로, <상처 입은 사슴>, 1946, 캔버스에 유채

 

  여성의 성적 대상화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여성의 신체와 속성들에 관한 사물화를 의미한다.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철학적 기원과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사물화란 칸트적 의미의 절대적 사물 그 자체(Thing), 미규정적 타자 X의 세계라는 층위와는 대별되는 것으로, 데카르트가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사유하는 존재(Res cogito)의 질서와 높이와 부피를 가진 물질적 세계(Res extensa)의 질서에서 후자인 물질적 사물로의 환원을 뜻한다. 사유하는 주체(Cogito)의 특권적 존재질서에 소속된 자들이 인식주체인 남성들이라면, 물질적 사물들의 세계에는 남성의 대립항이자 타자들인 여성, 자연, 동물 등이 놓인다. 그리하여 여성의 신체와 속성들은 높이와 부피, 무게를 측정하고 부분적 이용과 처분, 수단화가 가능한 물질적 사물들의 질서 안으로 편입된다. 사유주체의 존재질서에서 배제된, 그러나 여전히 과잉의 상태로 남아있는 여성이란 존재는 남성주체의 대상화 작업을 통해 육체 덩어리로 환원된다. 신체 부위마다의 수치·볼륨감의 측정·판정이 가능한 육체적 관능성·심미성의 기준, 삽입구라는 물질적 기능성의 기준, 대체가능성의 기준에 의해 물질적 사물이 되는 것이다.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 속 결박된 여성들의 신체 부위는 일상 속 여성들의 신체에 대한 미시적 폭력과 사회적 압박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더 나아가 남성주체의 의지와 상상, 욕구에 화답하는 순종적이고 관능적인 여성성은 드라마와 영화, 예술, 성담론의 재현체계를 통해 반복적으로 복제돼 현실세계의 여성들에게 ‘무엇이 진짜 여성인가’라는 표본으로 강력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기존의 포르노그래피, 롤리타 콤플렉스적 미디어들은 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욕망의 고정화된 경로 틀로 작동할 수 있고, 한정되고 유일한 답안으로 제시될 수 있기에, 우리는 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새로운 재현체계를 발명해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어떠한 수치심이나 남성중심적 대상화의 시선 없이 그려진, 국내 페미니즘 아트 그룹인 포르티시시모의 <월경하는 여자들>과 같은 여성주의 관점의 새로운 재현물들이 더 많이 노출되고 생산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 속 관능적이고 사물화된 육체성으로 그려지던 메인 모델 카오리(KaoRi)가 지난 4월, 드디어 침묵을 깨고 여성의 언어로 발화를 시작했다. 이를 진지하게 경청할 것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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