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영 / 사회학과 교수

 [페미니즘_‘여성’이 아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

  대한민국은 여성 혐오와 전쟁 중이다. 오래 쌓여 견고해진 가부장적 여성 혐오에,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공포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여성 혐오가 가세했다. 여전히 여성들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지식 노동자를 꿈꾸는 대학원생으로서, 인권운동인 페미니즘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에 본 지면에서는 대한민국 페미니즘에 대해 다양한 방면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언어와 페미니즘 ②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위인들 ③ 여성 몸의 해방과 주체성 회복 ④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

‘미투 운동’과 차별에 저항한 여성들의 역사

이나영 / 사회학과 교수

  현재 우리 사회는 ‘미투(#MeToo)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파도 속에 있습니다.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1월 29일 JTBC 뉴스룸 시간에 나와 검찰 내 성폭력 피해를 밝힌 이후, ‘미투 운동’은 문화예술계, 학계, 종교계, 정치계 등 전 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중입니다. 당시 인터뷰 자리에서 서 검사는 폭로의 이유를 밝히면서,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지 않고 근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성들은 처벌은커녕 지속적으로 사실을 부인하고, “지금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가해자, 심지어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며 사회적 타살을 감행한 남성들에 대해 집단적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가해자를 두둔하고 2차 가해를 일삼던 우리 모두에 대해, 구멍 난 법과 제도조차 작동하지 않았던 현실에 대해, 보다 더 근본적으로 성차별적 사회에 대해 일제히 공분하고 있습니다. 믿을 구석이라곤 유사한 경험을 한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와 지지밖에 없기에, 보이지 않는 피해자들을 호명하고 상호 말 걸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잊고자 했던 기억과 마주하고 재해석하고, 상처를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치유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서 검사의 말대로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다독이면서, 다른 이들의 상처도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분들은 음모론과 진영논리에 빠져 피해자를 의심하며 평소의 행실을 따져 묻고, 성폭력 피해 행위를 음란물처럼 소비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수많은 가해 행위들을 성찰하기는커녕 성폭력을 ‘성도착증’으로 병리화하거나 특정 개인을 악마화하며, 남의 집 불구경하듯 희희낙락 정쟁에 활용하기 바쁩니다. 심지어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하며 사안의 본질인 성별 권력관계와 성차별적 구조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을 ‘페미나치(페미니스트 나치의 줄임말)’로 몰아 낙인화합니다. ‘여자들이 문제’니 분리하고 배제하면 된다고(소위 ‘펜스 룰’)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시 문제는 가해자-남성 집단으로부터 분리돼 여성에게 전가됩니다.

단두대에 올라야 한다면, 연단에 오를 권리도 있어야 한다

  이런 일들은 그저 최근의 현상일까요. 역사적으로 여성은 성녀이거나 여왕이거나 유명한 남성의 적극적 내조자이거나 총애를 받는 애첩이거나 기생이거나, 사회면을 장식할 만큼 유명한 범죄극의 주인공이 아니면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여성의 역할 이상을 요구하는 여자들은 ‘미치광이’ ‘괴물’ ‘마녀’ 등 각종 조롱과 모욕, 손가락질과 공격을 받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거나 왜곡되어 기록돼 왔습니다. 그럼에도 ‘여성도 인간’이라고 외쳤던 여성들이 세상을 변화시켜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일제 강점기, 김명순(1896-1951)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시인이자 소설가, 언론인, 영화배우, 연극배우였던 김명순은 일본에서 데이트 강간을 당했을 때 언론의 실명 보도로 인한 2차 가해, 기생첩의 딸이라는 신분 공개 등으로 인해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방종한 여자” “문학적 가치가 없는 글”이라며 문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동향 출신 문인인 김동인은 그를 모델로 한 <김연실전>(1939)을 써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합니다. 김명순은 <칠면조>(1921)에서 자신의 처지를 시로 표현하지요. “내 자신아, 얼마나 울었느냐. 얼마나 앓았느냐. 또 얼마나 힘써 싸웠느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느냐. 네 몸이 훌훌 다 벗고 나서는 날, 누가 너에게 더럽다는 말을 하랴.” 이에 작가 김기진은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1924)이라는 글을 통해, “퇴폐의 미”와 “황량의 미”를 가진 타락한 여자로 김명순을 묘사하고, “처녀 때 강제로 남성에게 정벌(征伐)”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사후에도 김명순에 대한 평가는 변치 않았습니다. 전영택은 <내가 아는 탄실 김명순>(1963)에서 출생의 배경으로 인해 “변태적으로 살아가고 방종, 반항의 생활”을 했다고 기술했습니다.

 

 

  서구에는 프랑스 혁명 시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다 단두대에 오른 여성, 올랭프 드 구즈(O.Gouges)가 있습니다. 그는 귀족의 사생아였고, 교육받지 못한 문맹, 시골 출신의 젊은 과부였습니다. 젊고 예쁘고 똑똑하고 야심 찬 여자에게 결혼이나 성매매 이외 다른 선택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드 구즈는 남성을 통해 안락한 삶을 보장받는 걸 거부하고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독학으로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 정치적 참정권이 없던 시절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지요. 그는 <프랑스 인권선언>(1789)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에 여성이 배제돼 있음을 깨닫고 2년 뒤 1791년,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합니다. 이 선언문은 개인의 자유에 기반한 근대적 사고관으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전문(前文)에서 그는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다. 적어도 이 권리만큼은 여자에게서 빼앗지 말아 달라. 말해 보라. 내 성(性)을 억압할 권한을 누가 그대에게 주었는가? 그대의 힘인가? 그대의 재능인가?”라고 질문한 후, “모든 여성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제1조)” “여성이 단두대에 올라야 한다면 연단에 오를 권리도 있어야 한다(제10조)” 등을 주장하지요. 모든 여성의 보편적 권리를 담은 이 대담한 주장은 당대 남성들에게 던진 도전장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남성의 혁명, 남성의 평등만을 위한 혁명에 제동을 걸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793년 단두대에 오릅니다. 그의 죽음은 혁명기 남성들이 보편적으로 지닌 여성 혐오와 여성들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남성들은 드 구즈의 글을 ‘미친 여자의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깎아내리기 바빴고 온갖 개인적 비하,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심지어 <여성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시집 못 간 여자들의 불평과 하소연” 또는 “시장 생선 장수 여자들의 권리”로 폄하하고 조롱했으며, “남자 같은 여자”가 “자기 성별의 미덕을 망각”했기에 처형됐다고 하며, 동등한 참여를 소망하는 다른 여성들을 위협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사후 거의 백오십여 년간 드 구즈는 ‘개혁망상증에 걸린 정신착란증 환자’ ‘혁명 히스테리 환자’ 등의 취급을 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서구 여성운동 ‘제2의 물결’ 이후에서야 비로소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복원되지요.

‘남성’ 시대의 해체와 보다 정의로운 미래를 위한 희망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18년. 이제 ‘남성’들의 시대는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합니다. 여자를 열등하고 무지하고 비이성적이며 ‘몸뚱이’에 불과한 도구적 존재로 비하하고 조롱하고 공격하고 권리를 박탈하고 억압하고 지배하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대규모로 진행된 ‘대여성집단사기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종말을 고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전부터 그랬듯,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들은 세상을 보다 정의롭게 바꾸기 위해 일어서고 저항하고 연대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에 결핍된 것, 인권에 부재한 것, 평등에 결여된 것을 채우라고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차이를 차별로, 다름을 비하와 혐오로, 약자를 성적 대상이나 착취의 대상으로 만들어 온 남성 지배 연대체를 해체하라고. 케케묵은 남성성의 옷을 걸친 채 사회를 퇴행시키는 장본인으로 남지 말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디딤돌이 되기를, 그래서 다음 세대의 ‘우리’들이 조금은 더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꿈꾸며 걸어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 나혜석의 처절한 호소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대한민국은 과연 1930년대에 비해 얼마나 전진했을까요.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그러니 소녀들이여 깨어나 내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라.” 나혜석, <이혼고백서>(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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