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성찬 / 영화평론가

21세기 비평의 얼굴 ④ 영화비평의 새로운 가능성

 

 

21세기에 이르러 비평은 ‘대중’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양태를 보인다. 대중의 가능성을 끌어안으며 ‘비평가’라는 이름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또한, 21세기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비평’이라는 이름 아래, ‘대중’ ‘예술’ ‘작가’ ‘권력’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인식 전환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이 시대 비평의 위기와 존재 의미, 더 나아가 새로운 ‘비평의 시대’에 비평가는 어떤 책무를 지게 되는지, 비평의 새로운 활로는 있는지를 모색해 보려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21세기 비평, 무엇이 문제인가 ② 비평과 권력 ③ 다원예술 비평은 가능한가 ④ 영화비평의 새로운 가능성

 

 

대중비평 시대, 영화비평의 새로운 가능성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중심으로 -

 

 

 

변성찬 / 영화평론가

 

 

영화비평의 위기라는 어떤 소문에 대하여


 언제인가부터 영화 비평의 위기가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위기 담론은 아직은 어떤 흉흉한 소문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대상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다루는 비평에 위기가 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고, 더 나아가 요청되는 일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이러한 요청에 부응했던 가장 모범적인 사례 중의 하나다. 20세기 초, 인쇄술, 사진, 영화 등의 근대적 복제기술의 출현과 그것을 바탕으로 본격화된 대중문화를 마주한 벤야민은,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의 변화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는 곧 기존의 비평 모델 및 방법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진정한 비평의 위기는 이러한 자각과 문제의식을 전제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영화와 비평 모두에게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비평의 영역에 한해 말하자면, 전통적인 오프라인 영화잡지의 급격한 쇠퇴, 그리고 온라인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비평(mass critici-sm)’의 양적 확산이 그 변화의 대표적인 현상일 것이다.


 나는 한때 짧은 전성기를 누렸던 영화잡지의 쇠퇴를 곧 영화비평의 위기와 동일시하는 관점이나, 인터넷 및 SNS를 통해 양산되어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는 ‘대중비평’ 또는 ‘인상비평’의 증대가 ‘전문가 비평’ 또는 ‘본격비평’의 쇠퇴를 가져오고 있다는 가정에 공감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영화잡지가 쇠퇴하는 만큼이나 (일정한 원고료를 지급하는) 온라인 영화 비평 사이트 및 (원고료와 무관하게 수행되는) 자발적이고 다양한 온라인 및 오프라인 영화 동인지 활동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디지털 매체와 함께 도래한 대중비평 시대를 두고 “양이 질을 압도하고, 무질서가 질서를 대체하며, 속도가 거리를 살해하는 시대”라는 식의 비관적 진단과 부정적 평가를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그 ‘양, 무질서, 속도’ 속에서 어떤 작품과의 비평적 대화의 출발점이 되어준 단서나 영감을 얻은 경험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왜 양이나 속도의 증대가 질의 저하와 거리의 살해를 필연적으로 가져온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 양과 속도가 문제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비평이 해야 할 일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비평으로서는 ‘즐거운 소식’일 수는 있어도 ‘우울한 소문’이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특히 “무질서가 질서를 대체”하고 있다는 진술은 문제적이다. 왜 비평 행위에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하는가? 질서란 어떤 기준이나 원칙의 모델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인데, 나는 비평 행위에 그런 고정된 모델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재의 비평이 겪고 있는 (진정한 위기라기보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 체험을 근거로 말하자면, 소위 영화 전문지나 학술지에 실린 긴 전문가 비평이나 본격비평을 읽고 나서 어떤 비평적 빈곤이나 공허함을 느낄 수도 있었고, 반대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비-전문가일 것으로 짐작되는 필자의) 짧은 ‘인상비평’을 통해서 새로운 비평적 통찰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진정으로 문제인 것은, 19세기 이래 확립된 일정한 분량의 ‘문자비평’만을 본격비평의 변치 않는 모델이라고 여기는 낡은 사고방식일 것이다.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에 대하여


 2014년 겨울부터,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audio-visual film critic)’이라는 새로운 비평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유운성과 안건형이 ‘미디액트’에서 2014년과 2015년 겨울에 두 번에 걸쳐 했던 강좌가 그것이다. 유운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영화의 변화에 상응하는 비평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고민해 온 (내가 아는 한, 유일한) 한국의 영화 평론가다. 오디오-비디오 필름 크리틱 강좌는 그러한 문제의식의 연장 속에서 기획된 프로그램이다(이에 대해서는 《문학과 사회》에 게재된 유운성의 <밀수꾼의 노래 : ‘영화 비평의 ‘장소’에 관하여’ 이후, 다시 움직이는 비평을 위한 몽타주>를 참조할 것).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이라는 이름은 기존의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작업이나 오디오-비주얼 에세이 작업이 지니고 있던 비평적 차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전유하는 개념 및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개는 파운드 푸티지 및 직접 촬영한 시청각적 이미지에 자막 및 내레이션으로 첨가된 언어적 요소들이 결합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Audio-visualcy’라는 비메오그룹의 사이트(vimeo.com/groups/ audiovisualcy)에 들어가면 그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업은 단순히 전통적인 문자비평에 시청각적 질료의 인용 가능성이라는 효율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업의 시도는 창작과 비평의 경계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 개념 및 실천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진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필름 시대부터 수행되어 온 아주 ‘오래된’ 것이다. 20세기 초부터 수행된 ‘편집영화(compila-tion film)’ 작업, 비디오 시대에 수행된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 (Histoire(s) du cinema, 1988~1998)>, 매체 전환기에 수행된 톰 앤더슨의 <로스엔젤레스 자화상 (Los Angeles Plays Itself, 2004)> 등의 작업은, 말 그대로 창작과 비평의 계기가 식별불가능하게 융합되어 있는 선구적인 작업들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영화사의 위대한 걸작들은 어떤 자기 성찰 즉 비평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의미 있는 것이었고, 위대한 비평들은 영화의 경계 및 지도를 새롭게 그려볼 수 있는 ‘상상력’ 즉 창작의 계기를 담고 있는 것이어서 흥미로운 것이었다. 디지털의 도래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 어떤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트뤼포가 말했던 영화 사랑의 3단계(보고, 쓰고, 만들기)의 실천이 더 적은 시간과 비용을 통해서 가능해졌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물론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업 그 자체가 바로 영화비평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유운성의 말처럼, “디지털 영상저장 매체 덕택에 추억 없는 기억과 망각 없는 비평의 시대에 접어든 지금, 비평이 영화적 세부를 뒤지며 방향 없는 숨은그림찾기 놀이에만 몰두하게 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현재 영화비평의 위기는, 나날이 새로워지면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거나 기존에 확립된 대문자 영화사에 맞서 새로운 계보학적 지도 그리기를 요청하고 있는 영화를, 비평이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영화비평의 새로운 가능성은 비평의 비평 자신에 대한 성찰적 질문이 없다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 비판적 성찰은, 기존의 (비교적 긴 분량의) 오프라인 문자비평을 본격비평과 동일시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막대한 양의 (비교적 짧은 분량의) 온라인 ‘대중비평’을 ‘인상비평’과 동일시하는 낡은 이분법 또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할 것이다.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업 자체가 바로 그 성찰과 새로운 가능성을 담보해 주는 충분조건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시작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영상 및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에게 비평적 행위를 시도해 볼 수 있는 무대가 될 수 있고, 그 집단적 시도 속에서 새로운 비평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나는 여러 번에 걸쳐 있었던 위기 담론(또는 흉흉한 소문)의 현장에서보다, 10여 명의 디지털 세대와 함께 수행하는 두 번에 걸친 그 실험의 현장에서 새로운 영화 비평의 가능성을 예감하고 고민할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문제는 그 실천의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과 그것에 장애가 되고 있는 법적, 제도적 문제(소위, ‘저작권 문제’)다. 이 장애물은 진정한 ‘밀수의 정신’을 통해 돌파되어야 할 것이고,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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