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해 /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연속기획, '판']

예부터 ‘판’이 열리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론장이 평등한 시민들의 합리적 소통을 위한 공간이라면 ‘판’은 순수 우리말로 구성해 볼 수 있는 개념이다. 판에서는 이야기판, 술판, 씨름판 등 다양한 상상이 일어날 수 있다. 본지는 민속학자에게 ‘판’이란 무엇인지를 먼저 들어본다. <편집자 주>


민주적 학문 공론장으로서 이야기판 만들기

 

임재해 /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오늘날 한국의 학문 공론장에서는 공정한 토론판이 구성되지 못하고 있다. 교수는 진부한 주장을 횡설수설해도 ‘말씀’으로 인용되는데, 학생들은 아무리 독창적인 견해를 논리적으로 이야기해도 한갓 ‘말’일 따름이다. 학문적 담론의 논리나 설득력과 무관하게 화자의 지위에 따라 위계가 정해지는 탓이다. 학생들은 침묵하게 되고, 사회적인 문제에도 적극 나서지 않도록 길들여지게 된다.

학생은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일일이 높임말을 쓰면서 토론하는데 비하여, 교수는 ‘네가 한 말’이라고 낮춤말을 쓰면서 상대적 우위의 특권을 누린다. 그러나 이야기판에는 상하위계에 따른 차별이 없다.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으뜸이다. 부자거나 지식이 많다고 해서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이야기를 잘 해도 특정인이 이야기를 독점해서는 이야기판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좌중이 돌아가면서 두루 이야기를 해야 할 뿐 아니라, 듣는 사람도 이야기에 끊임없이 참견해서 양방향 소통을 해야 제격이다. 그러므로 학문 활동의 현장에서도 이러한 이야기판의 원리가 통용되어야 생산적인 학술판이 벌어진다.

 

민주적 담론 공동체로서 이야기판의 인식

모든 담론 공간처럼 이야기판에도 화자와 청자의 구분이 뚜렷하다.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꾼과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한 자리를 이루어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이 이야기판이다. 이야기판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주체인 것 같으나, 듣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탁월한 이야기꾼도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따라서 이야기판에는 청중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청중이 이야기판을 조성해야 비로소 이야기꾼이 나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꾼이 주체이고 청중이 객체라고 하더라도 이야기판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청중은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도 하는 까닭이다. 이야기꾼도 자기 이야기가 끝나면 청중 노릇을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하는 주체인가 하면 어느 새 청중 역할을 하는 객체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하고 듣는 역할을 수시로 바꾸는 까닭에 이야기판의 좌중들은 이야기의 주체이면서 객체이고 객체이면서 주체이다.

이야기를 할 때도 이야기꾼이 주체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청중이라고 하여 잠자코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끊임없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는가 하면, 이해가 안 되는 대목에서는 질문도 하고, 순조로운 구연을 도와주기도 하므로, 청중은 보조 이야기꾼이자 대리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청중은 이야기꾼에게 이야기를 하도록 부추기는 연출자 역할을 하는가 하면, 이야기가 끝나면 이야기에 대한 논평자 역할도 한다. 이야기의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자기가 공감하는 새 이야기를 한다. 이를테면 집안은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이야기에 대하여, ‘남자하기 나름’이라는 이야기를 하거나, ‘효도는 자녀들의 책임과 의무라’는 이야기에 대하여 오히려 ‘부모들의 행실과 사랑’이 효에서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하고 듣는 현장은 양방향 소통의 이야기판이자, 세계관적 논쟁의 공론장인 것이다.

조선시대 락밴드 '난공불낙'
조선시대 락밴드 '난공불낙'


학문 이야기판 만들기와 지평융합 효과

이야기판이나 놀이판과 같은 판문화의 전통에서는 사회적 위계가 문제되지 않는다. 오직 이야기와 놀이를 하는 능력만 문제된다. 부자라고 해서 이야기판을 독점할 수 없고 양반이라 하여 씨름에 이길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지 않는다. 이야기판이나 씨름판에서는 오직 이야기와 씨름을 잘 하는 사람이 으뜸이다. 노래판이든 풍물판이든 능력껏 판에 참여할 수 있다. 노래판에서 양반이라 하여 앞소리꾼을 차지하거나 풍물판에서 부자라 하여 상쇠 노릇을 할 수 없다. 역량을 갖춘 사람이 공론에 의해 추대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판문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결정되기 마련이다. 능력 위주의 공정성이 작동되는 까닭에 이야기판과 같은 판문화 현상들은 발전될 수밖에 없다.

학문적 공론장도 이야기판처럼 서로 대등하게 양방향 소통을 하는 열린 공동체의 담론판을 만들어야 세계적인 학문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학회에서는 물론 학내에서도 특정 논제를 두고 양방향 소통의 이야기판을 마음껏 벌여야 한다. 이야기판처럼 양방향 소통의 민주적 공론장을 만들어가려면, 학생들이 교수와 대등한 담론주체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수들이 학생의 자리로 내려가서 낮은 자세로 소통을 이끌어가는 일이다. 학생들의 주장이 엉뚱할수록 귀를 기울이고 논리적 비약이 클수록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엉뚱한 견해와 비약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 학생시절의 특권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려들면 교수는 물론 학생의 학문도 제자리걸음 할 수밖에 없다. 모두 기존의 인식지평에 갇혀 있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양방향 소통으로 학생들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을 생산적으로 공유할 때 학문 공론장의 새 지평이 넓게 열린다. 만들어진 지평과 만들어가는 지평이 양방향 소통으로 지평융합을 이룰 때 학문은 논쟁적 발전을 하게 마련이다. 우리 학문의 공론장에서도 이러한 민주적 담론판을 만들어야 학문발전은 물론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누가 무엇을 한다고 판이 벌어지거나 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을 보고 듣고 즐기는 사람이 있어야한다. 또한,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기본적 조건을 최소한으로 갖추어야 판이 벌어진다. 그리고 판문화를 이루는 연행상황은 사회적 공간과 조건이 만들어내긴 하지만, 연행 자체는 사람이 한다는 점에서 사람의 주체적 연행이 중요하다. 사람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 직업에 따라 연행상황이 결정되기도 하나, 이야기판이나, 술판, 싸움판처럼 누구나 할 수 있고, 하게 되는 판도 있다. (…) 판을 만드는 것은 개인적 능력과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지 사회구조에 의해 필연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판문화의 연행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 일시적 상황이자 상호소통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재진행의 적극적 행위를 뜻한다. 또한 문화적 전통 속에서 작동되는 집단적 전승의 공유화라 할 수 있다.”

-임재해, 논문 「민속에서 ‘판’문화의 인식과 인문학문의 길찾기」 중에서 발췌·재구성

 

 

[첫 번째 “판”]
대학원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3월 10일(목) 저녁 6시 30분 302관(대학원) 1층 로비

대학원신문에서는 원우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지면에 담아내기 위해 새로운 연속기획 “판”을 엽니다. 매달에 둘째 주 목요일, 여러 학과 원우들과 함께 한 공간에 모여 이야기판을 만듭니다. 시론하고, 잡담하고, 먹고 마시는 “판”에 누구나 참여가 가능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원우는 caugspress@gmail.com이나 ‘중앙대 대학원신문 페이스북 페이지'로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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