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이양수와 사회학자 오찬호가 진단하는 우리 사회의 침묵

특집│침묵

대담: 철학자 이양수와 사회학자 오찬호가 진단하는 우리 사회의 침묵

 

경쟁 권하는 사회, 말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의 청년세대는 진정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세대인가. 청년들이 말하지 않는다는 질문은 옳은가? 청년들은 왜 말하지 못하고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시 말할 수 있을까? 이번 특별기획에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대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청년’에 대한 두 분의 느낌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오찬호(이하 ‘오’) _ 옛날 벽화에도 “요즘 아이들은 버릇없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건 역사에서는 언제나 젊은 세대가 말이 많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봐요. 세속에 스며들기 전, 부양의무가 없고 질풍노도가 유지될 수 있는 시기니까 말이 많은 거예요. 즉, 젊은 친구들은 생애사적으로 정치적인 소리를 내는 데 유리한 상태를 사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최근 한국에서, 인류의 역사 속 모든 젊은이가 누려 왔던 정치적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시대적 분석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양수(이하 ‘이’) _ 제가 보기에 선생님께서 예로 드신 “청년들은 버릇없어”라는 말은, 기성세대의 판단으로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걸 정치적으로 놓고 보면, 청년이 진보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진보성이 드러나지 않으니까 문제시하는 건 조금 다르게 볼 여지가 있다고 봐요. 청년세대가 진보적이지 않고 보수적이어서 말하지 않는 것과 특정한 상황에서 공적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상황은 다르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오늘날 청년들이 말하지 않고 있다’는 문제 진단은 타당하다고 보십니까?

_ 말하자면, 어떤 선택을 한 개인은 욕할 수 없지만, 그 선택을 한 집합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판단할 수 있거든요. 청년이 부당한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분명한 문제이고, 그래서 ‘청년이 말하지 않는다’는 진단은 옳다고 봅니다. 말하지 않는 청년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지만 말하지 않는 이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_ 저는 청년들이 말해야 한다는 시선이 기성세대의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부정의를 보고 부정의하다고 말했는데 너희들은 왜 안 그러냐”는 거죠. 이처럼 ‘말하지 않는 청년’을 정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까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그보다는 ‘말할 것이 없다’는 표현이 낫지 않을까요. 청년들이 자신의 관점이나 삶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공적인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인데, 왜 그런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관점으로 청년을 바라보지 말고, 지금 청년이 처한 상태 내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못하며 무엇에 좌절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단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공적 말하기 전체를 포함하는 문제입니다. 예컨대 수업 시간에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도 공적 말하기죠. 많은 선생님들이 “요즘 학생들은 말도 안 하고 토론도 안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정치적 영역에서 말하지 않는 것과 공적 영역에서 말하지 않는 것 간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지요.

_ 저는 과거 세대가 말하는 기술이 더 뛰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보다 지금 공적인 이야기를 쓸데없는 이야기로 보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너 좀 오글거린다”, “진지 빤다”처럼요. 과거에는 그게 있어 보여서 멋도 모르고 발언을 내뱉곤 했는데,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하면 돌아오는 시선이 곱지 않고 이익도 없으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

_ 동의합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정치적 의견이 없다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표현 방식 차이라고 봅니다. 기성세대에게 공적 문제는 도덕적 당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너는 틀렸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죠. 그런데 젊은 세대에게는 도덕적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나에게 의미가 있는지 판단을 해야 하는데, 미리 도덕적 가치판단을 해 버리면 말하기 주저하게 되죠. 실제로 토론을 해 보면 도덕적 가치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가장 거세게 나오는데, 점점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서 토론이 깊어집니다. 저도 기성세대이지만, 가치를 결정해 놓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_ 이 질문은 어떤 의미에서는 “옛날에는 어떻게 말을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었나”일 것입니다. 그때의 과잉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 적어 보이는 거죠. 7~80년대는 말하는 게 곧 도덕이었던 독특한 시절입니다. 고작 30여 년 사이에 행동기준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어요. 지금은 말을 안 하는 게 도덕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에는 말하면 불이익도 당하고요. 과거 직장에서 임원 뽑을 때 검열하던 방식들을 신입사원 뽑을 때 적용하니, 불이익 정도가 아니라 안 하는 게 훨씬 좋은 게 되어 버린 겁니다.

_ 2002년 월드컵 때만 해도 젊은이들이 이렇게 암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믿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 세대들은 정확히 부정적인 현실 속에서 출발하잖아요. 그러니까 대학교 2, 3학년만 되면 각자 자기 삶에 골몰하는 상황이 만들어져 버린 거죠.

 

두 분 모두 대학 강의에서 토론 수업을 해 보면 실제로 무엇을 느끼나요?

_ 토론 수업을 해 보면 처음에는 굉장히 밋밋해요. 그런데 후반에 갈수록 이제 진짜 이야기가 나와요. 그 부분을 찾아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이 나오면 학생들이 이미 다 말을 하고 있는 거죠.

_ 그런 강의들이 줄고 있다는 게 포인트죠. (웃음) 구조적으로요.

_ 맞습니다.

_ 요즘은 하도 스펙이 포화되니까, 인사담당자가 성적표를 봤을 때 느낌이 약간 묘한 거 있잖아요. 시민단체, 세계적 혁명사 이런 게 쓰여 있으면 “이런 걸 들었어요?” 한다고요. 그래서 강의를 들을 때도 적극적인 태도를 못 취합니다. 물론 아주 일부의 기업이 체크하는 거지만, 취업이 제대로 안 되면 모든 게 공포로 보이거든요. 그래서 이것도 관리, 저것도 관리하다 보면 어떤 수업을 듣는지, 어떤 책을 읽을지까지도 관리하게 되죠.

_ 학교 수업이 공적 문제에 대해서 개방된 수업이면 괜찮은데, 취업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_ 학문에 권력이 없으면 자기 생각을 구체화할 수가 없는 거죠. 우리 사회가 다 시장질서를 옹호하는 강의들을 하잖아요. 예를 들어 월요일 3교시에 오찬호라는 사람이 와서 사회를 비판하는 강의를 했어요.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면, 화요일 7교시쯤에 마르크스 경제학 한 번 등장해 줘야 돼요. ‘저렇게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구나’를 느껴야 돼요.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그런 사람이 굉장히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거죠. 다들 돈 많이 버는 방법만 알려주려고 하는데 너 혼자 자본주의가 어쩌고 철학이 어쩌고 한다는 겁니다.
저는 해가 갈수록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수위를 낮추고 있죠. 학생들이 힘들어하니까요. 그런데 학생들은 저를 초현실적으로 바라보더라고요. 저런 얘기를 도대체 왜 하느냐는 식으로. 저는 그 모습이 초현실적이죠. 자기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걸 이상한 식으로 바라보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학문에 권력이 없는 거예요. 비판적인 소리를 내는 학과가 없어지고요.

_ 모든 것을 포기하는 세대, 그리고 경쟁사회에서 직장을 얻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상황에서 비판이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은 특정 사건을 보는 시각 안에서 나오는 것인데 내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사회를 비판하는 게 싫은 거죠.

 

잠깐 주제를 바꿔서, 두 분이 학교 다니던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청년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_ 저는 97학번이라 어디 명함 내밀 학번이 아닙니다. (웃음) 그런데 분석을 해 보면, 시대에 따라 게시판에 붙이는 대자보 스타일이 달라진다는 걸 알 수 있어요. 80년대에는 정치에 관한 관심이 과잉되었고 90년대 중반부터는 정치적 무관심, 지금은 정치에 대한 혐오까지 이르렀다는 거예요. 90년대 초에도 시위하면 최루탄도 터지고 그랬던 것 같은데, 제가 군대 다녀오고 나니 상황이 싹 바뀌어 있더라고요. 대자보가 외면받고 취업특강 같은 게 그 위에 붙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허가받아서 붙이는 형식으로 변하고요. 90년대에도 차별이 있긴 했지만 “대학생이 쪽팔리게 남 차별하고…” 이런 소리가 있었는데 2000년대부터는 확실히 달라졌어요.

_ 그 이면에는 대학생 숫자가 늘어나면서 대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진 것도 있죠. 8~90년대 대학생은 소수고 사회적 특권을 누렸어요. 나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직업을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2000년대 들어오면서 대학 숫자가 많아지고 대학생도 많아지고 특권 자체가 사라졌다….

_ 그렇죠. 특권이 있으면 도덕성이 생기거든요. “취업 잘 되는데 우리가 왜 까칠하게 살아야 하는데?” 식으로요. 그런데 지금은 다들 백수로 지내니까 경쟁 집단에서 한 명이라도 더 배제시켜야 되는 거죠. IMF는 사회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환시키는 데 전쟁만큼이나 효과가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모든 지표가 그 시점을 기준으로 완전히 달라지고 있거든요. 7~80년대 발언할 수 있었던 것도 너무나 무서운 적이 선명했기 때문입니다. 두들겨 패는데 가만히 있으면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IMF 이후로는, 이전에는 그저 승진이 안 되던 것이 이젠 회사에서 해고되고 길바닥에 앉아 버립니다. 명백히 내 피부에 가해지는 압력이다 보니, 하라는 걸 해야 하고 사회가 시키는 것을 해야 하는 경험이 훨씬 강해졌다고 할 수 있죠.

 

 
 

이런 것들을 신자유주의 시대의 권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정치권력에 저항해야 했는데, 지금은 정치권력이 아닌 돈의 힘이 작용하다 보니 더 눈치를 보게 되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_ 저희 세대에서 스타벅스는 제국의 상징이었어요. 그런 것들을 맛볼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세대는 그것이 생활입니다. 그 생활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이 패배자의 삶이 되어버리고요. 지금의 젊은 세대는 자본주의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가치판단을 하기 전에 자본주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죠.

_ 어디로 화염병을 던져야 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군부독재라면 거기로 던지면 될 텐데 말이죠. 저는 고민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본주의에 물화되었다고나 할까, 자본주의 비판에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전 세계적인 변화는 그러한데 유독 왜 한국에는 그렇게 깊숙이 적용되었는가 하는 것이죠. 다른 나라 젊은이들은 공론장이 형성되고, 어떻게 저항해야 하며 시민단체는 어떻게 만들고, 이런 교육적 흐름이 있는데 우리는 왜 유독 속수무책이냐는 겁니다.

_ 제가 보기에는 근대화과정에 있어서 서구와 한국의 차이인 듯합니다. 서구는 근대화과정이 2~300년이었잖아요. 한 사람이 어떤 결과를 낳으면 다음 세대가 그 결과를 평가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것을 압축시키면서 한 세대가 다 경험해 버렸어요. “내가 해봤는데 너는 왜 해?” 식이다 보니 한국의 특수성이 더 강화돼서 일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_ 예를 들어 농협은 IMF가 되자마자 부부 사원 중 여성을 다 해고했답니다. 그러면 가정에서는 자기 딸을 “너는 그런 상황에서도 절대 잘리지 않을 만큼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키운다는 거예요. 사교육도 더 시키고요.

_ 그걸 경험해 봤으니까요.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반영돼 나오는 거죠.

_ IMF라고 하면 무슨 노숙자만 생각하는데, 사회 전체로 공포가 갔다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중앙대의 사례를 놓고 보면, 이번에 선임된 총장도 법인에서 임명했거든요. 교수들은 입을 모아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학생들에게는 무관심한 일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갖지 못하는 걸까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_ 철학 공부, 사회학 공부하는 우리는 답할 수 없는 질문 아닌가요. 활동가를 데려와서 “띠 두릅시다” 이래야 되는 거 아닌가. (웃음)
대학에서 토론해 보면요, 삼성의 세습 같은 것에 관해 토론이 잘 안 됩니다. 자기 아버지가 아들 물려주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식이에요. 자기 소유니까 문제없다는 인식이 굉장히 강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립대학이 자기 원하는 사람 총장으로 세우는 게 과연 비민주적인가에 대해 합의가 잘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분노하는 데 관심이 없는 게 아니고 절차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대학 교양수업에서 토론 수업을 할 때는 그것이 문제라고 결론을 이끌어가는 게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토론을 많이 했는데, 나중에 소문이 나더라고요. 의도된 토론을 한다. 답을 정해놓고 토론을 하는 나쁜 수업이다. 제가 한동안은 아이들을 이해를 못 하다가, 이게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 속에서 그것을 문제시할 자원을 확보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르게 되었어요.

_ 지금 같은 상황 속에서 뭘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이 있으니 그 생각의 이유를 들어 보는 과정이 시작점이 아닐까요. 무관심과 혐오는 이 부분에서 다른데요, 무관심은 들을 가능성이라도 있는데 혐오는 아예 귀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지금 입장에서는 그런 가능성을 막아내는 것이 일차적으로 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학교만이 가진 특권이라고 생각하고요. 학교에서 나간 뒤에는 이해관계 안에서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요.

_ 제가 학교에 정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가, 학생들이 제 수업을 평가할 때 논술형 시험을 ‘정직하지 못한 시험’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나는 정직하게 딱 외워가지고 점수 잘 받는 수업 들을래”라는 거예요. 논술형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 거죠. 그러다 보니 문제를 낼 때도, 채점할 때도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전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지적 총량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_ 오히려 학생 선택권을 주고, 학생들이 선택하는 범위 내에서 심화시킬 수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교양 수업을 대단위로 하잖아요. 모든 사람을 모아 놓고, 어떤 것에 초점을 두지 못한 상황에서 상대평가를 해야 하니까, 학생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가 흔히 미국 대학, 하버드가 좋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거기에는 Liberal Art College라고 해서, 교수 한 명당 학생이 4명 정도예요.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실컷 놀아도 그 안에서 같이 얘기하면서 자기 것을 찾는 과정이 있어요. 고등학교에서 넘어온 학생들 200명, 300명을 “너 잘해봐라” 식으로 두면 자기 결과를 못 낼 수밖에 없는 거죠.

_ 재미있는 현상이, 시중에 보면 글을 잘 쓰는 방법에 관한 책도 늘어나고, 책을 어떻게 읽을지에 대한 책도 늘어났거든요. 그게 바로 모든 것을 매뉴얼화해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현상이거든요. 맨땅에 헤딩해서 글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고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면, 청년들이 다시 발언하도록 하는 최소한의 조건에는 뭐가 있을까요.

_ 굳이 추상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기성세대의 역할은 청년세대의 잠재력을 찾아 주는 거잖아요. 청년세대는 자신들이 이야기할 공간, 내 일자리를 갖고 내 삶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는다는 건 단순한 실업이 아니라 내 인생의 미래가치를 다 포기하는 거잖아요.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그 다음이 없고 악순환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 민족적 자결의 차원에서 세대 간에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_ 우리나라는 모두가 함께 행복해야 한다고 하면 모두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만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까 답이 안 나오죠. 모두의 행복이란 누구든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 즉 하한선을 어디로 맞추느냐는 거거든요. 제가 볼 때 다시 발언하도록 하는 조건은, 자본의 물적 토대에서 누구든지 삶의 기본권과 존엄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모든 사람의 노력이라고 봅니다. 경쟁에서 지더라도 막장 구렁텅이가 아니도록 만들어 놔야지만 다양성이 보장되는 거죠.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에 대해 협상을 해 놔야 한다는 겁니다. 자본주의가 능력주의에 따라서 차별적 보상을 하지만, 그게 위를 잘해주라는 뜻이지 아래를 함부로 대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거죠.

 

이번 대담을 통해 하나의 정답을 찾는 사회,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줄 세우고 평가하는 사회의 삭막함을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청년들은 말하지 않는 것이라기보다 말을 못 하고 있다는 점이 대담을 통해 도드라 졌다. 금융 위기와 경기 침체, 일자리가 점차 줄어들어 가는 현실 속에서 모두가 자기 의견을 자유로이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점점 어려워져 간다. 이 대담을 눈으로 함께 들은 여러분의 일상 속에 ‘말’은 얼마나 살아 있는가. 수업에서, 세미나에서, 그리고 각자의 일상 구석구석에서, 우리는 말하고 있는가.

정리 김대현 편집위원│chris3063@naver.com
사진 양윤식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