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난제의 지도 그리기: ④ ‘유럽 시민’은 가능한가

2009년 10월만 해도, 유로지역 경제의 고작 3%를 차지하는 그리스의 위기는 눈 감았다 뜨면 지나갈 감기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5년 현재 그리스의 위기는 유럽 전체의 생존을 좌우하고 있다. 그리스는, 유럽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리스 위기는 우리가 알던 유럽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편집자 주>

 

유럽, 국제주의 혹은 민족적 균열의 장

 

<그리스 난제의 지도 그리기> 기획은 한국 보수우파 진영에서 복지 포퓰리즘, 복지 망국론 등으로 손쉽게 도구화되는 그리스 위기가, 그처럼 단순화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짚고, 위기의 원인을 다양한 차원에서 접근해보고자 했다. 한국인에게 그리스 위기는 일면 익숙하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가부도의 위기와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리스 위기는 낯설기도 한데, 그 위기가 유럽연합이라는 독특한 경제적‧정치적 맥락 속에 있어서이다. 이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리스의 위기는, 경제중심적 유럽통합의 구조적 모순(“신자유주의적 경제통합과 통화동맹의 모순”: 321호), 그리스 내부의 정치적 격동(“그리스의 정치 격동과 시리자의 등장”: 322호), 2008-9년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의 영향(“미국발 금융위기가 그리스에 남긴 것”: 323호)이라는 주제와 연결시켜 이해해야만 그 진정한 원인에 다가설 수 있다.

지금까지의 기사가 각각 유럽 경제, 그리스 정치, 세계 경제와 관련되었다면, 이 글은 ‘유럽 정치’에 초점을 맞춰 그리스 위기가 남긴 유럽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선 기사들에서 보았듯 유럽통합은 하나의 (금융)시장과 하나의 화폐를 만드는 방향, 즉 경제통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나, 이 방향이 모두의 합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통합은 경제적 기획인 만큼 정치적 기획이기도 했다. 이번 마지막 글에서는 유럽의 정치적 통합이 왜 실패하였는지,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의 위기는 어떻게 다시금 정치와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기하였는지 살펴본다.

정치적 기획으로서 유럽연합

유럽통합의 역사는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이하 공동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위 공동체에서 민주주의와 정치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는데, 이 공동체들이 각국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동의 경제적 이해를 효율적으로 조정하고, 경제적 이득을 바탕으로 국민국가 간 화합을 모색하려는 기능주의적 의도를 강하게 내포하였다. 만약 이 공동체가 참가국이 기대하는 이득을 제공하지 못했다면, 그 국가는 언제든지 탈퇴를 고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경제적 비용-편익의 문제였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유럽연합이 탄생하면서 나타났다.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합된 느슨한 조직은 정당성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예컨대 각국의 경제성장이나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 유럽공동체 차원에서 추진되고, 이는 각 국민국가의 정책결정 범위를 제약한다. 그럼에도 유럽 차원에서는 정치적 책임을 지기 위한 민주주의 메커니즘(선거 등)이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문제가 발생하고 유럽과 국민국가의 정책결정이 모순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으로 출범된 유럽연합은 이러한 문제를 절감하고 경제적 통합에 더해 ‘독립된 정치공동체’를 표방하였고, 이로써 절차적인 민주주의에 근거한 정당성을 갖출 것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유럽연합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전면적 논의를 촉발시켰다. ‘아래로부터’ ‘사회적 유럽’을 건설하려는 흐름이 존재했다면, 반대로 ‘위로부터’ 단일 시장과 단일 화폐를 도입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1999년 유로화의 출범은 이 논쟁에서 누가 승리했는지 시사하며, 그 결과가 우리가 지금 아는, 하나의 (금융)시장과 유로화를 가진 유럽연합이다. 유로화의 도입에 전후하여 사회적 유럽을 건설하고자 하는 각국 시민들의 저항은 경제화폐동맹(EMU)에 대한 반대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저항적 흐름에 대응하여 ‘위로부터의 제도적 혁신’으로 제정된 것이 바로 유럽헌법이다.

유럽헌법은 유럽연합을 묶는 제도적 틀을 명문화하여 유럽의 정치적 통합과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매개체가 될 것으로 인식되었다. 2000년 니스조약 이후 구성된 ‘유럽의 미래를 위한 회의’는 2003년 이 헌법의 초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유럽통합의 방향과 정도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한 상황에서, 헌법의 법적 효력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이 촉발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계급, 인종 등 여러 가지 정체성들에 터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졌던 정체성은 바로 국민적(national) 정체성이었다.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유럽적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유럽 인민(European people)’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유럽연합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암스테르담 조약은 ‘유럽연합의 시민권은 참여국가의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때 유럽연합은 독립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할 권한이 없으며, 유럽연합의 시민권은 회원국의 국적을 매개로 성립되는 추가적인 지위로 주어진다. 게다가 근대국가 시민권의 필수인 사회보장권에 대한 규정이 전무하고, 유럽시민으로서 이행해야 하는 구체적인 의무 내용(국방, 납세 등)이 없다. 즉 유럽연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는 ‘유럽 인민’의 지위가 유럽헌법에서는 불완전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유럽헌법을 둘러싼 국가 간 이해관계도 대립하였으며, 2004년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헌법을 기각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유럽의 위기와 균열

유럽의 경제통합이 심화되고, 유로화가 세계 화폐시장에서 달러 다음의 지위를 차지하자, 유럽연합은 의심할 바 없는 성공을 거둔 것으로 생각되었다. 유로존 국가들의 경제는 성장했고, 유럽의 해결되지 못한 정치적 모순은 성공의 그늘 뒤에 가려져 있었다. 정치 통합의 문제가 다시금 불거진 계기는 미국 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그리스와 남부 유럽에 닥친 재정위기였다. 유로존의 경제성장을 이끈 유로화의 도입은, 유로존 국가들 내에 극심한 구조적 불균형을 가져왔다. 이는 서로 다른 경제규모를 가진 국가들이 무리하게 단일 화폐로 통합되면서 생겨난 결과이기에,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 간 합의에 기반한 정치적 재조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경제적 통합에 상응하는 정치적 통합이 부재했던 유로존에서 위기는 예고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위기관리에서 나타났다. 유럽연합은 위기에 대응해 공통의 협력적 결정을 내릴 기구가 부재하였고, 유럽연합 지도부는 특정 국가의 이해관계에 깊이 개입되어 민족적 결정을 내렸다. 독일의 정치지도부와 기술관료들은 유로존 내의 구조적 불균형을 인정하지 않았고, 위기의 원인이 남유럽 국가들의 ‘방만한 재정운용’에 있다는 ‘도덕주의적 해석’을 내 놓았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 판단 하에서 유럽연합 국가들 간 재정이전은 고려되지 않았고, 구제금융을 대가로 한 긴축, 그것도 아주 강도 높은 긴축이 강제되었다.

위기 해결의 과정에서 그리스와 독일의 민족 감정은 격화되고 있다.
위기 해결의 과정에서 그리스와 독일의 민족 감정은 격화되고 있다.

위기 이후, 유럽 정치는 더욱 커다란 균열 지점에 위치해 있다. 아래로부터 유럽의 주권을 지지할 유럽 인민의 부재,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권리와 책임, 연대의 주체로서 유럽 시민의 부재는 유럽연합에서 민주주의의 결여를 낳는 문제로 지속되어왔다. 게다가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손실의 공동 부담이 필요해지자, ‘유럽의 인민들’ 내부의 적대가 더욱 심화되었다. 독일 여론은 그리스 국민들을 게으르고 무능한 집단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자신들의 세금을 사용하여 위기 국가들을 구제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직접행동으로 표출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강도 높은 긴축을 강제당한 그리스는 독일과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고, 이는 긴축에 저항하는 ‘민족주권’ 수호 운동 등,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지닌 시위로 폭발했다.

흥미로운 점은 민족국가를 넘어선 국제주의의 새로운 시험장으로 주목받았던 유럽연합이, 위기를 맞아 민족적 균열과 충돌의 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유럽연합이 지금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에게 장기적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그 해법은 실현 불가능하고 그리스 국민들을 끝없는 궁핍으로 이끄는 긴축은 확실히 아닐 것이다. 장기적으로 유로존 내부의 구조적 불균형을 인정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단기적으로는 그리스 부채를 탕감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통합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적인 정치적 상상이 필요하다.

전영은 편집위원┃na67301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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