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화된 기호 속, 상실되어 가는 인간

김정훈의 <비-코드(B-code)>
 

 
 

 

김예림 / 무용평론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공연예술센터가 주최하는 제15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이하 SPAF)가 지난 10월 한 달간 개최됐다. 베를린 앙상블(Berliner Ensemble), 피핑톰 무용단(Peeping Tom) 등 세계적 예술단체와 엄선된 국내작 등 22편의 연극과 무용이 공연된 이번 SPAF는 메인공연 못지않게 부대행사들도 관객과 예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중 김주원, 차진엽, 김설진 등 무용계 스타들의 협업으로 화제가 된 ‘제5회 솔로이스트’와 젊은 무용가들의 뜨거운 경연의 장인 ‘제9회 서울댄스컬렉션’은 축제 종료 후에도 길게 회자되며 높은 관심을 끌었다.

올해로 9회를 맞은 서울댄스컬렉션은 공연형식의 경연을 통해 유망한 젊은 안무가를 발굴하는 SPAF 내의 행사로, 본선 수상자들에게 해외진출과 협업을 통한 재공연의 기회를 제공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외 관심과 참여가 늘고 있는 만큼 이번 서울댄스컬렉션은 기존 9편이 아닌 총 12편의 작품을 선정해 경연의 장을 확장했다. 예년보다 높아진 경쟁 속에서 김정훈의 <비-코드(B-code)>는 전보람의 <서로 엇갈리게 바짝 맞추다>, 최민선/강진안의 <기초 무용>과 함께 ‘올해의 Best 3’에 선정됐다. 선정된 세 작품은 독일 포츠담, 일본 요코하마, 싱가포르 등의 초청을 받아 공연하거나 현지 무용가와의 협업 기회를 얻게 된다.

지난 10월 29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김정훈의 <비-코드>는 코드화된 기호 속에 상실되어가는 인간미를 남성 4인무로 풀어낸 수작이다. 안무가 김정훈은 삐걱거리는 소파의 반복적 소음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무용수, 바코드를 상징하는 조명디자인 등으로 주제를 충실히 표현해냈다. 무표정의 무용수가 소파에 앉아 위아래로 움직이며 내는 소음은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영화 <델리카트슨>(1991)을 떠오르게 한다. 침대 매트리스의 삐걱대는 소리가 음악이 되고 첼로연주와 어우러지는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김정훈의 <비-코드>에 더욱 매료될 것이다. 고요 속에서 집중할 수밖에 없는 소파의 반동은 음악의 시작뿐 아니라 움직임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 리듬의 확장 속에 네 명의 무용수들은 바코드 모양으로 선명하게 새겨지는 바닥의 붉은 선들 사이에서 위태로운 춤을 춘다. 통제와 거부, 갈등과 체념 속에 탈진한 몸은 작품의 시작처럼 아무 감정과 에너지가 입혀지지 않은 몸으로 돌아가고, 암전 속에 삐걱거리는 소리만을 남긴 채 사라진다.

 
 
 
 

 

최근 티브이 프로그램 <댄싱9>의 인기로 춤의 매력을 알아가는 대중의 확대는 반가운 일이지만, 여기에 욕심을 내자면 멋있는 움직임의 단편이 아닌 작가적 관점에서 주제를 해석해나가는 ‘안무’라는 작업에 대해서도 이해와 관심이 깊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정훈의 <비-코드>는 <댄싱9>의 스타들 못지않은 춤기량과 함께 코드의 차가운 규제 속에 고민하는 뜨거운 인간성을 춤에 담아내는 안무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반갑다. 지나치게 관념적이지도, 신체성을 과시하지도 않은 <비-코드>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균형을 적절히 하는 김정훈의 작품색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는 최근 중앙대학 출신 남성 무용수들의 기량이 무용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그들이 무용수뿐 아니라 안무가로서 잠재력을 가진 예술가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다. 안무의 모범 답안같은 성실한 밀도를 보여준 김정훈에게 엉뚱 기발한 일탈을 권하며 그의 다음 무대를 기대해 본다.

 

■ 김정훈 / 안무가. 중앙대 예술대학 무용과 및 동대학 교육대학원 무용교육전공 석사 수료. 제47회 전국신인무용콩쿠르 현대무용부문 수석상, 2011 베를린 탄즈 국제콩쿠르 1등상, 제9회 서울댄스컬렉션 안무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은 <샤도우즈(sha-dows)>(2015), <비-코드(B-code)>(2015)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