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정 / 영어영문학과 교수

[선생님의 연구실]

영국 낭만주의 시를 통한 ‘관계’의 성찰

조희정 / 영어영문학과 교수

 

 

 
 

  동화책을 읽고 독서감상문을 쓰던 어린 시절부터 문학은 나에게 늘 ‘관계’의 기록으로 다가왔다. 주인공이 주변의 타인들과 갈등하고 소통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모습 속에서 나는 삶을 이루는 중요한 가치들을 형성하게 되었고, 또 독자인 내가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작품 속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공감하게 되는 경험은 제한적인 나의 체험을 뛰어넘어 타인에 대한 이해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었다.

  역설적으로, 문학 공부를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이런 ‘관계’의 양상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는 소설보다 ‘관계’의 흔적을 찾아나가야 하는 시가 내게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서정시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사적 경험을 담고 있는 것으로 규정되지만, 근대 이후 생산된 서정시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고독과 자의식으로 충만한 이 시들이 사실 그 근저에 타자에 대한 깊은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영국 낭만주의 시대에 창안된 ‘대화시’라는 시 형식은 공동체의 붕괴 속에서 위기감을 느끼던 당대의 시인들이 타자를 호출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은 이런 방식으로 코울리지와 워즈워스의 시를 이해하고자 했던 나의 시도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그의 ‘의사소통적 윤리’가 낭만주의 대화시에 적용되는 방식을 살피는 것이 박사 논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연구의 중요한 줄기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낭만주의 대화시가 표출하는 타자에 대한 열망은 거의 언제나 온전한 관계를 수립하는 데에는 미처 도달하지 못하며, 이런 좌절의 과정을 담은 텍스트들은 하버마스가 근대를 ‘미완의 기획’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고 판단했다. 또한, 서정시 속에 나타난 타자와의 관계를 섬세하게 살피는 과정에서 레비나스와 바흐찐의 이론은 논의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낭만주의 대화시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여성의 시적 재현 방식, 그리고 당대 여성 시인들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남성 시인들의 대화시에서 호출되는 타자가 대개 연인이나 누이동생인 경우가 많기에, 텍스트 내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목소리는 지워져 버린 이 여성 청자는 늘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렇게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 여성은 대화시의 텍스트 속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사 속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 있다. 워즈워스의 조력자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훌륭한 작가였던 도로시 워즈워스, 낭만주의 시기 소네트 형식의 유행을 불러일으켜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샬롯 스미스, 또 당대의 여배우로 이름을 떨쳤으며 여성적 시 쓰기의 새로운 모델을 구축했던 메어리 로빈슨 등의 작품은 아직도 이들이 당대의 문학사 속에서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 준다. 영미권에서 여성 낭만주의 시인들에 대한 연구가 지난 2-30년 동안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에 비해 국내에서는 아직 이들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부족하다고 생각되기에, 앞으로도 이 여성 시인들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내 연구 방향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최근 들어 나의 학문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또 하나의 주제는 개인을 뛰어넘어 서구라는 집단적 주체가 다른 세계와 맺어 온 ‘관계’의 양상에 대한 탐색이다. 사이드가 말한 것처럼 세계 질서 속에서 서구적 헤게모니의 기반은 이미 18세기부터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낭만주의 시에 수없이 나타나는 지리적/문화적 타자에 대한 연구는 이상하게도 국내에서 별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19세기에 자본주의적 관계를 수출하는 산업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생산된 낭만주의 텍스트는 새로 발견된 세계에 대한 호기심, 동경, 욕망, 불안감, 두려움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여러 층위에서 드러낸다. 세계 각국의 신화 체계를 바탕으로 창작된 로버트 사우디의 장편 시들을 비롯해서 셸리나 바이런의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낭만주의 텍스트를 통해 서구의 제국주의 담론이 형성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앞으로의 내 연구가 지향하게 될 또 하나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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