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부산대 故 고현철 교수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故 고 교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다면 감당하겠다”는 유서를 뿌리고 4층 건물에서 투신했다. 무엇이 그에게 민주화를 위한 희생을 강요했는가? 우리는 그의 죽음에 어떤 책임을 지며 그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학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들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공간에서 비벼야 할지 알 수 없지만, 7년간 대학에 몸담았던 필자는 이 최후의 보루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라는 걸 안다. 정부가 재정지원을 무기로 대학을 입맛에 맞게 길들인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던가. 그에 호응해 대학을 장악한 기업이 경영하는 속에서, 민주주의가 숨 쉴 틈이 있었겠는가.

  거슬러 올라가자면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어 일제 신민 엘리트를 양성한 것이나, 이승만 정권이 대학을 반공 이데올로기의 생산 공장으로 사용한 데서부터 대학은 단 한 번도 자율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다만 오늘날에는 평가라는 채찍과 지원이라는 당근으로 ‘고상하게’ 개입할 뿐이다. 교육부가 ‘선진화’니 ‘정상화’니 해서 대학의 자율성을 옥죄는 것은, 95년 문민정부의 5.31 교육개혁에서 ‘세계화’라는 말로 시작했던 대학 길들이기의 최신 판본이다. 국가권력이 주도하는 대학 구조개혁은, 대학 교육이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존재함을 의미한다. ‘공공성’과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논리 구조를 갖는 이 대학의 ‘민족성’은, 기업들이 주장하는 ‘시장화·사립화’와 충돌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보고 있는 대학의 현실이다. 엄청난 양적 팽창, 교육의 질 저하, 대학 내 민주주의의 훼손, 굴복을 내면화한 대학 주체들의 탄생….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대학의 존립 근거는 교육의 공공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구성원들과 논의 없이 진행되는 끝없는 구조조정, 등록금 인상, 콩나물시루가 된 강의실, 학생자치의 퇴조 등 한국 대학이 당면한 현실은 대학을 망치는 교육부와 기업의 합작품이다.

  故 고 교수는 교육부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행태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대학과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 무뎌져 있다는 점”이라고, 그렇기에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무너지는 대학의 현실 앞에 무기력했던 필자는 그의 죽음에 충격받았다. 많은 사람이 그랬길 바란다. 그래서 오늘의 대학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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