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샤를리 에브도 특집을 하며 많은 반성을 했다. 목숨까지 내놓으며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혹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
  작년 신문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다. 글 써본 지가 오랜데 기사는 쓸 수 있을까, 취재가 어렵지는 않을까 등. 하지만 한 학기 동안 편집위원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애초에 했던 그런 걱정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긴 부끄럽지만) 취재는 발로 열심히 뛰면 되고 글은 여러 번 고치면 됐다. 나 혼자 하는 신문사도 아니니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늘 신문은 나왔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글을 쓰고 취재를 하고 밤을 새우는 것보다 큰 문제는 참 말하기 힘든 것이다. 신문이 나오고 나면 늘 그 단어는 언급되었고 그 단어에 우리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물론 우리에게도 잘못은 있다. 우리는 모두의 말을 듣고 이에 근거해서 글을 썼지만, 누군가 ‘우리의 입장은 언급되지 않았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도 잘못은 있다. 우리의 태도가 그렇게 보였다면 또 그렇게 보인 우리 잘못도 있다. 이번 샤를리 에브도 사건처럼.
  지난 학기를 보내고 발간하는 첫 신문에서 샤를리 에브도 특집을 하며 많은 반성을 했다. 우리가 너무 쉽게 하는 것은 아닌지, 더 많은 원우가 신문을 보도록 어떤 해법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사실보다는 진실’을 써야 하는 건 아닌지. 편집회의를 하다 죽은 12명의 사람들. 나는 그들처럼 할 수 있을까. 아마 나는 절대 못 할 것이다. 예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으러 현장을 돌아다닐 때도 나는 못했으니까. 현장에 있는 것이 너무 괴로웠고 슬퍼서 그 장면을 담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곤 포기했었다. 신문사를 하면서 종종 그 기억이 떠올랐고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가 정말 부끄러웠다.
  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어떻게든 표현해보기로 했다. 샤를리 에브도 특집인 만큼 샤를리 에브도의 그림을 가져와 그 안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섭다. 사진을 찍으며 짓밟히는 현장을 본 기억이 있기에. 그래서 번역기를 돌려 불어로 적었다. 내가 생각해도 우습지만 샤를리 에브도는 원래 불어로 실려야 제맛이라며 정신승리를 해본다. 아- 반성하는 지금도 나는 너무 비겁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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