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리 / 사회학과 석사

몸이 변한다: 사회적 현상의 비판적 형상화

김유리 / 사회학과 석사

ⓒ홍성용
ⓒ홍성용

  몸을 둘러싼 뜨거운 사회적 관심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을까. 홍성용의 디지털 몽타주 <사회적 몸>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디지털 몽타주 작업으로서 이 시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첫째, 이 작품이 피사체를 장악하고 변형시키는 사진 예술, 나아가 디지털 사진 예술의 매체 정치학 그 자체를 환기시킴으로써 사회적 몸이라는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드 사진은 피사체와 작가 사이의 불평등한 시선의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애초 벗은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관음증을 토대로 한다.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따라 재현, 변형된다. 나아가 디지털 사진 기술은, 이미 촬영자의 관점에 의해 재현된, 즉 변형된 원래 피사체를 한 번 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조작하고 변형할 수 있도록 한다. 이때 원본 이미지로서 신체를 먼저 촬영하고, 이 원본 누드 이미지를 녹슨 철판, 인조 가죽 등과 합성해내는 이 인위적이고 세심한 <사회적 몸>의 작업 과정은, 우리의 몸이 사회적으로 변형되는 상황이란 실로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은밀함 속에서,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섬세한 측정과 관리, 배려와 노력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두 번째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형상화하는 그의 두 가지 상반되는 전략, 몸의 동질화와 이질화에서 나온다. 그의 작품은 한편으로는 재현되는 몸들의 개별성을 제거하고 일상화, 비주관화, 동질화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작품 속의 신체는 일상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다. 얼굴이 없어 피사체의 인격적인 특질들 역시 드러나지 않아, 이 시리즈에 속하는 여러 작품들에 등장하는 신체들은 일정한 동질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과 불쾌감을 갖게 할 정도로 신체의 이질적인 변형을 전면화하고 있다. 인조가죽에 얼기설기 꿰맨 듯한, 혹은 부식된 금속판 같은 피부는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이로써 홍성용은 논문에서 목표로 한 것처럼, 흉측하게 변형된 몸의 이질성이 얼마나 보편적으로 경험되고 있는지에 대한 아이러니를 강력한 “시대적 초상화”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한다.
  따라서 <사회적 몸>은, 그러한 몸을 생산하는 힘을 비판하고, 그로 인한 비극을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된다. 홍성용 작가는 그 자신이 작업의 도구로 삼는 디지털 사진 매체 역시도 오늘날 미디어 테크놀로지 환경 속에서 사회적 몸을 생산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통렬하게 성찰하고 있는 셈이다. 살갗을 바늘로 꿰는 고통, 몸을 부식시키고 또 부패시킬만한 외적 폭력 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몸의 비극’의 현장을 관객이 직시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의의가 있다.
  다만 모든 작품들이 여성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논문에서 젠더적인 쟁점이 최소한으로만 제시되고 있는 점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일례로 그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생트 오를랑을 참고하였다고 밝히고 있지만, ‘몸의 변형’에 젠더 정치학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는 논문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논문에 나타난, 육체를 자본화하는 자본주의 질서, 실재와 가상 사이의 모호성과 같은 틀이 그의 작업에 전혀 유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제시하는 몸의 변형이 여성에게 특히 가혹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좀 더 부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비로소 그가 왜 하필 ‘여성의 누드’를 원본 이미지로 채택했는지가 훨씬 선명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사회과학 전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몸 연구에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몸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시도는, 몸과 자아 사이의 관계를 일관적이고 조화로운 것으로 상정하는 기존의 관념에 대한 비판적 영감을 제공한다. 성 상품화, 성형수술과 같은 주제들뿐만이 아니라, 바람직한 몸, 바꾸어야할 몸을 결정짓는 몸 관념, 부끄러움, 불편함 같은 구체적인 몸 인식, 그리고 고통을 무릅쓰고서라도 기꺼이 몸을 변형시키려는 다양한 실천들을 다루는 사회학적 연구들이 그의 작품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시간의 경과와 환경적 영향에 따라 부식되는 몸을 조명한 작품들의 경우, 노화와 건강 불평등의 측면에서 조명해볼 수 있을 듯하다. 피부는 늘어져가고, 부식된 철가루같은 살비듬이 떨어지는 노년의 신체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또한 오염되고 낙후된 주거 환경 및 과도한 노동 조건이, 창백한 얼굴, 굽어진 허리를 가진 ‘가난한 몸’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드러내고 비판할 수 있을까. 홍성용 작가의 다음 작업에서 더 많은 대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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