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6.11 목 16:51
기획예술
[노예제와 오늘] 유전되는 노예제권은혜 / 한예종 영상이론학과 석사
송재영 편집위원  |  ulypuck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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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호]
승인 2014.06.14  15: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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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은 마을을 떠나 인간을 경멸하다


  국내에서 <도그빌>을 통해 대중적으로도 유명해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만덜레이>(2007)는 가능하면 숨기고 싶은 ‘좋은 예술’, ‘좋은 영화’에 대한 나의 고집스런 편견을 끄집어내 맞닥뜨린 영화다. 내 안에 좋은 예술 작품에 대한 정의가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만덜레이>가 주는 것과 비슷한 유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접할 때면, 세상에 대한 믿음과 의로움으로 충만했던 때에 형성돼 아직까지도 가장 내밀한 곳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좋은 예술’의 상이 떠오르고야 만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좋은 예술이란, 어떤 식으로든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이것을 스스로가 편견이라 여기고,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어 하지 않는 까닭은 이러한 ‘좋은 예술’에 대한 의지가, 예술에 과도한 부담과 책임을 지우고 있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작품을 비평하는 기준으로 작동할 때, 작품을 풍부하게 보지 않는 부분들이 생겨나 치밀하지 못한 비평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짐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덜레이>는 예술에 대한 내 은밀한 아집을 꺼내 보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인간이 가진 이중성과 모순성을 폭로하고 조롱할 목적으로 만덜레이 농장과 그 속의 인물들을 창조한 듯 보였다.

   
 

  갱단 두목인 아버지와 함께 도그빌을 떠나온 그레이스는 남부의 한 농장에서 누명을 쓰고 채찍을 맞게 된 노예 티모시를 구해주게 된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수호자이며 정의로운 성격을 가진 그레이스는 노예가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음에도 노예제가 이어지고 있는 만덜레이 농장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농장을 건설하기 위해 아버지의 부하들 몇몇을 이끌고 그 곳에 정착하기로 한다. 농장의 소유주였던 백인 마님이 정한 “마님의 법칙”에 의해 유지됐던 만덜레이 농장은 이제 그레이스에 의해 민주주의와 협동, 자율의 법칙에 의해 통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유농장의 시작부터가 이율배반적이다. 아버지의 부하들이 소지한 기관총의 위협아래 새로 쓰인 계약서는 만덜레이 농장이 이전까지 노예였던 흑인들의 공동소유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원래 농장의 소유주였던 백인 가족들을 역으로 노예화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그레이스는 “마님의 법칙”을 경멸하면서도, 그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심리에 의한 노예의 등급’에 영향을 받아 7급(간사한)이라 분류된 티모시를 1급(고귀한)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훗날 자신의 오해를 깨달은 그레이스는 분노하고, 그녀로 인해 거둬졌던 티모시를 향한 채찍을 그녀 스스로 들게 된다. 그레이스의 교육과 계몽으로 전파된 토론과 다수결의 원칙은 사람을 죽이는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되고, 영화 마지막에 가서는 그레이스를 새로운 ‘마님’으로 추대하는 데까지 이용된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조롱의 칼날이 겨누는 대상은 그레이스로 대변되는 미국식 정의와 원칙뿐만이 아니다. 자유와 함께 찾아온 방종은 만덜레이 농장을 파산으로 이끌고, 굶주림을 참지 못한 늙은 윌마는 폐렴에 걸린 아이에게 제공된 고기를 훔쳐 먹는다. 티모시는 자존심이 강한 먼시 왕족을 연기했지만, 실은 먼시 왕족이 부리던 저열한 노예 혈통인 만시였으며, 농장의 집사이자 유일하게 혜안을 가진 인물로 비쳐진 월헴은 “마님의 법칙”을 손수 집필하여 만덜레이 농장의 70년간의 노예제를 승인해온 이였다. 유일하게 행동과 생각에 있어, 모순을 가지지 않은 인물은 스스로를 ‘닥터’라고 지칭하는 도박꾼이다. 그러나 그의 경제활동의 핵심이 농장주와 담합하여 해방된 노예들을 파산하게 함으로써, 빚을 담보로 한 노예와 다름없는 계약을 지속시키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그 역시 근본적인 측면의 정당성은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이 모든 인물의 군상이 가진 표리부동함을 전래동화를 읽어주는 듯한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과 우아하면서도 극적인 바로크 음악의 사용과 같은 교묘한 영화적 장치와, <도그빌>에서처럼 연극적 세트를 무화시키는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 연기를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해낸다. 
  이러한 과정을 훌륭하게 성공해낸 뒤 감독은 영화의 에필로그로 미국에서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수모와 해방운동, 죽음들이 기록된 다큐멘터리 사진을 데이빗 보위의 음악 ‘Young American’과 함께 흘려보낸다. 노래와 함께 무차별적으로 제시되는 이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도그빌>, <워싱턴>과 함께 미국 3부작의 두 번째로 기획됐다는 <만덜레이>에서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내 미간의 주름이 더욱 굳어져갔다. 만약 언젠가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이야기를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두 가지를 묻고 싶다. 첫째, <만덜레이>가 왜 인간경멸이라 이름 붙여야 할 3부작이 아닌, 미국 3부작 중 한 편인가. <만덜레이>에서 그린 인간군상의 모순이 미국에만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가. 둘째, 당신이 조소하고 있는 인간 본성의 어떠한 면이 만덜레이의 세계라면, 당신이 죽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이 세상을 믿고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더 보기: 자유마을, 만델레이에서 벗어나다

  노예제가 일말의 정당성도 확보하지 못하는 지금, 해방이라는 희망 또한 존재한다. 국제NGO인 Free the Slaves의 케빈 베일스가 <Slavery Today>(2008)를 통해 소개한, 한때 마을 전체가 노예였던, 지금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된 한 마을을 일례로 나누고자 한다.
  북부 인도의 손바르사라는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무려 4세대 동안 노예였다. 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채석장에서 일했다. 그들의 세계는 마을 경계가 끝이었다. 노예주는 그들의 모든 활동을 감시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4세대 동안의 노예제 안에서 이들은 한푼도 자유롭게 소유할 수 없었고,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어느 날 이곳에 노예제 폐지운동 단체인 산칼프의 활동가가 찾아왔다. 준비없이 이뤄진 자유는 재앙이 될 수 있다. 만약 노예들이 예속된 삶 이외의 방식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이들의 자유는 실패할 수 있다. 산칼프 활동가는 이를 이해하고 있었고, 2001년부터 손바르사 사람들과 길고 조심스러운 대화를 시작했다.
  몇 달 후 마을 사람들이 파업을 벌이자 노예주와 그의 흉한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겁먹은 노예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흉한들이 노예들을 굴복시키려고 했을 때, 도리어 돌 세례를 받았다. 충격을 받은 노예주는 도망쳤지만, 한밤중에 다시 돌아와 마을을 불태웠고, 한 아기가 불길에 집이 무너질 때 나오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유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인근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채석장에서 오랜시간 노동했기 때문에 이들은 돌을 다듬는 법과 오두막을 짓는 법을 알고 있었고, 곧 새로운 마을이 탄생했다. 산칼프 활동가들은 그들을 도와 새로운 마을 주변의 채석장을 빌릴 수 있게 해줬다. 스스로를 위해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빚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마을사람들은 개개의 인격채로 성장했고, 각각은 미래에 대한 특별한 꿈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마을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였다. 산칼프와 함께 일하면서, 한때 노예였던 이들은 새로운 직업들을 얻을 수 있었고 교육, 의료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005년에 지역 선거가 열렸고, 자유 마을의 사람들은 산칼프 사람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99명의 자유로워진 노예들이 선거에 나섰고, 이 중 79명이 선거에서 당선됐다. 더 놀라운 것은, 여성이 천대받는 이곳 사회의 상황 속에서, 새롭게 당선된 공무원 중 3분의 1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자유마을의 사람들은 여러 다른 공동체와 협동했다. 많은 이들은 그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통해 한두 마리의 소를 샀고, 협동조합에 참여해 3천명 이상의 구성원을 갖췄다. 이 조합을 통해 이룬 것 중 하나가 우유 협동조합이다. 수백 명의 우유 생산자들이 함께하면서 계약에 대한 협상력을 얻었고, 그들의 우유에 더 좋은 값을 매기는 것이 가능해졌다. 
  모든 마을들은 노예제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숲을 복원했고, 노천광의 폐허를 연못과 관개 시스템을 갖춘 풍경으로 바꿨고, 학교와 병원을 지었고, 아이들의 인신매매를 막고, 해방된 노예들을 위한 정치적 지도자로서 일하며,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삶을 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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