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무슨 소리인가 싶어 두 눈만 꿈벅꿈벅. “선생님”. 저 사람이 누구 부르나 싶어 고개를 좌우로 획획. 대학원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 이렇게 반응했다. 마땅히 지칭할 호칭은 없고,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성의 표시를 하기에 ‘선생님’은 무난한 호칭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 호칭의 진짜 주인들이 갖는 무게감에 휘청하곤, 손사래를 쳤던 것이다.

  대학원생을 어떻게 부를지에 대한 고민은 호칭의 문제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부를 이름이 마땅찮다보니 호명되지 않고, 호명되지 않은 이들은 잊힌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대학원생은 존재감이 없다. 학부의 등록금, 구조조정 등의 문제가 대학원의 등록금 상승과 학과 철폐라는 위기로 이어져서야, 논문 표절, 금품 수수 등 교수 비리가 불거져 나와서야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학원 사회는 학부에도, 학계에도 오롯이 포함될 수 없는 성격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 없이 그저 때와 편의에 따라 공부하는 학생, 학교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용자, 학문계 종사자 등으로 탈바꿈하는 대학원생만의 변신술은 앞서 언급한 표류에 일조한다. 학벌 세탁하러 온 고령 학부생, 늙은 취업준비생, 표현만 바뀌었을 뿐 새로울 것 없는 학문 내용을 반복하는 학문계 아바타, 교수의 아바타 등은 대학원이 학부 생활의 연장, 교수의 일부일 뿐이라는 인식을 나타낸다. 이 모든 조롱의 표현들이 억울하기도 하지만, 선뜻 반박하며 나서지도 못한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의식, 그것의 달성을 향한 의지가 없는 곳에는 어느 모습이나 들어앉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없다는 말은 곧 존재의 부재를 의미한다.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대상은 제대로 바라볼 수 없고, 통찰할 수 없다. 제기되는 문제는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그에 따라 제시된 해결책은 공허하기에 개선을 이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 확립은 대학원 사회를 개선할 그 무엇보다 중요한 첫걸음이다. 이 첫걸음을 위해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다시 생각한다. 겸손의 마음으로 사양했던 그 이름이 존재감, 정체성 뒤에 숨어 성가신 고민을 하지 않기 위한 좋은 핑계거리가 된 것은 아닌지. 이도저도 아닌 모습으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비겁한 태도는 아닌지. 휘청하기 싫어서 거부했던 무게감을 다시 짊어지고, 이를 견뎌보기로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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