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피겨 등의 경기를 직접 경기장에서 관람했던 이들이 국민의 몇 퍼센트일까. 정확한 통계수치가 없어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지만, 국민들이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 열광해마지 못해하는 축구만 해도 평소 K-리그 경기의 관람인원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지만 올림픽은 다르다. 올림픽은 4년마다 우리가 잊었던 경기규칙과 주요선수들을 망각의 언저리에서 소환시킨다. 우리는 흥분하고 혹여나 판정시비나 불합리한 경기결과가 주어진다면 그 흥분의 정도는 정치적인 운동으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지난 소치올림픽에서도 이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인 운동은 오히려 어떤 운동보다도 비정치적으로 보인다. 김연아의 빼앗긴 금메달을 되찾기 위해 ISU(국제빙상연맹)에 제소하는 서명운동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응당 실천해야하는 보편적인 권리 찾기가 되고, 이는 정치를 관통해나가 어떤 신성한 무언가를 향한 숭고한 행위로 전화한다.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인 스포츠를 ‘보면서’ 열광할 수 있는 것은, 그것도 동일종목이어도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국제대회라면 열광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발적으로 그 스포츠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인 자발성의 환상이다. 누구도 시킨 적 없기에 자발적이지만 우리는 은밀하게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열과 성을 쏟으며 나의 국적을 확인하고 드러낸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민족동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간체계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하나다. 국가간 화합과 정정당당한 경쟁이라는 목표를 물질화해 결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국적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다면 답하라’. 정정당당한 경기를 통해 대중은 국민으로 호명되고, 선수들의 체력은 곧 국력이 되며 이는 메달 개수로 계서화돼 전시된다. 우리는 그 전시된 순위를 통해 나(조국)의 위치를 확인한다. 우리는 국력의 경연장에 상상적으로 초대돼 각자의 방식으로 국력성취의 상징물을 체험한다. 은밀하고 위대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박탈된 금메달은 개인의 소유가 아닌 국가라는 숭고한 대상이 쌓아올린 금탑의 일부분이다. 모든 ‘나’는 대한민국이기에 우리는 그 금탑의 훼손된 부분을 복원해야할 신성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 일상에 존재하는 적대와 갈등은 일순간 우리를 관통하는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속박돼 눈 녹듯 사라진다. 삼성 노동자들의 파업도, 정당강제해산이라는 유례없는 정치공작도, 다시 불붙는 철도민영화 추진도 모두 상상적인 관계를 맺는 우리들의 시야에서는 사라져버린다. 이 적대의 기만적인 해소는 생산관계 재생산의 신비가 증명되는 순간이다. 이는 노동자도 자본가도 대한민국 국적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동일성을 (재)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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