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6.11 목 16:51
기획예술
[창작을 위한 감상]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장들 / 화가
김승일  |  seed1212@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306호]
승인 2013.12.07  11:18:25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빌 트레일러는 여든 살이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빌은 노예였다. 빌은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나서는 소작농으로 일했다. 아내와 자식들이 빌 보다 먼저 죽어서 빌은 혼자 남겨졌다. 빌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그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빌은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것을 갑자기 생각해낸 사람처럼 짧은 기간 매우 많은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 의식하지 않더라도 빌은 이미 예술가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빌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 빌은 자신의 그림 도구와 그림을 그릴 때 받칠 작은 탁자를 시장에 가지고 나와서 그림을 그렸다. 시장은 매우 시끄러웠다. 한 사내는 술을 마시고 있다. 신사는 춤을 추고 있다. 상인은 소리를 지르고 있다. 개는 짖어대고 있다. 빌은 그 사이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빌의 그림들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확장된다. 춤을 추고 있는 신사 곁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사내가 술을 마시고 불평을 쏟아낸다. 음악이 잔잔해지면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 확장된 세계에는 괴리감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독립된 이미지들이 서로 뒤엉켜지기 때문이다.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 세계 속에서 주체가 홀로 떨어져 나와 그 주변에 경계선을 그리는 순간. 경계선과 경계선들이 다시 세계를 채우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그 순간들을 사랑한다. 경계는 필연적으로 모순이다. 끊어짐과 동시에 이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캔버스에 경계와 모순을 그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선이 될 수도 있고 인물이 될 수도 있고 풍경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한계를 그리고, 한계 너머의 것을 짐작한다.

  빌은 대상들의 개성보다는 살아있는 것이라는 공통점에 시선을 두고 그림을 그린 것 같다. 나는 종종 군상 그리기를 즐기는데 개개의 인물을 그리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생각한다. 등장인물들은 어떤 부류로 나뉘어져 있고 그 부류들은 근본적으로 나의 복제라는 공통점을 가지면서 각기의 상황에 처해있다. 다시 말해 나는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상황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나의 복제와 같은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이러한 도상을 생각 했을 때 나는 빌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그림 속 인물들과 빌의 그림 속 인물들이 닮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삶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된 노인이었다. 나 또한 보잘 것 없는 사람이다. 모르는 것투성이고 잘하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경계선에서 의문을 느끼고 경계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을 캔버스에 옮기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모여서 모두 다른 곳을 쳐다보는 사람들, 줄지어 걷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채워지면서 나에게 달려드는 날벌레 떼. 나는 배우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는다. 배우지 않아도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는다.

<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김승일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06974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중앙대학교 302관(대학원) 201호 대학원신문사  |  대표전화 : 02-881-7370   |  팩스 : 02-817-9347
인터넷총괄책임 : 편집장 | 게시판총괄책임 : 편집장 | 청소년보호책임자 : 편집장
Copyright 2011 대학원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cauo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