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희담의 소설 <깃발>은 80년 광주의 비극을 보여준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도청에 남길 원했고, 그렇게 했던 그들은 비극적 혁명을 맞이한다. 알튀세르는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에서 그러한 비극적 혁명관을 제시한다. 그는 비극의 본질이 관객을 배우로 변화시키는 힘에 있다고 말한다. 관객이란 구경꾼이고 배우란 행위자이기 때문에, 비극은 구경꾼을 행위자로 변화시키는 힘이라 바꿔 말할 수 있다. 80년 광주혁명도 당시의 구경꾼이던 사람들이 행위자로 변화하는 과정(‘우린 모두 광주의 자식이다’)을 겪는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추가되는 것은 숭고한 가치를 위한 희생이다. 비극에서 배우는 승리/패배를 넘어 자신의 가치를 위해 자신(생명)을 내던진다.

  ‘최종범’이란 이름이 우리 앞에 있다. 삼성의 노조탄압이 또 다시 죽음을 불렀다. 그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것은 삼성의 무노조경영과 악덕 노무관리, 위장도급이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최저임금에 가까운 임금만을 받았다.  삼성과 노동자간의 비극이 최종범을 열사로 만들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고통과 멸시 속에서 살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비극은 곳곳에 계승돼 구경꾼을 행위자로 전화시키고, 능동적 역능을 우위에 서게 한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그러면 너희들을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었는가를……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 거야”. <깃발>에 나오는 이 대목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명징하다. 역사는 결코 정치인들의 말이 아닌 숭고함에의 희생으로부터만 생성될 수 있다는 것, 망각을 경계하고 비극의 생성적 힘으로 열어젖혀진 틈으로 들어가는 것.

  정치의 과잉시대는 역설적으로 정치의 잔여물만 대량생산한 채 과소정치로 귀결된다. 정치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곱씹는다면 우리는 은폐된 정치의 공간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최종범 열사가 비극적 숭고함으로 일종의 혁명을 실천했다면, 바로 그로부터 개방된 공간이 우리가 마주하고 저항해야할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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