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시절을 철원에서 보낸 필자는 유달리 싸늘한 요즘 날씨에 새삼 추억들이 아롱거린다. 내복 상의까지 벗은 채 아침 구보를 한바탕 뛰고 나면 보이는 건 온통 뿌연 입김들. 새벽 안개보다 더 진하게 피어오르는 입김들을 보면서 그때의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최근 미디어에선 추억 팔이가 한창이다. 드라마 <응답하라>시리즈의 흥행 때문인지는 몰라도, 퇴근 후 거실에 앉아 추억에 잠기는 3-40대의 표정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사실 이른바 복고 열풍이나 추억 팔이와 같은 미디어 마케팅은, 마치 ‘올해는 청바지가 유행할거야’라는 말처럼 기묘한 말이 돼버린 지 오래다.

  물론 이러한 회상의 작업들이 모두에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리라.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에게 고백하지 못한 후회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유년의 시간들을 다시금 소환-반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한 회상 작업엔 지금-여기에서의 응시와 함께 모종의 권력관계가 내재된다. 마치 과거의 주체들은, 알튀세르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나 과소결정된 사건으로, 즉 하나의 우발적인 잠재태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시네마 천국>(쥬세페 토르나토레, 1988)에서 중년 토토가 알프레도의 선물(키스신 모음)속에서 발견해내는 것 또한 그렇게 지극히 우연적인, 하지만 과거를 원래 그것이 있던 곳이 아닌 다른 어떤 구조 속으로 한꺼번에 이행시키는 파토스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은 잘려나간 키스신과 같은 기억의 틈새를 옅은 상징들로 잇는다. 자신의 추억을 새롭게 재구성해내는 드라마를 본 후, 힐링했다는 위안이 드는 건 대게 이런 메커니즘을 가진다.

  다만 이런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쉽게 과거로 달려가는 시간여행을 하고 이로부터 미래를 향한 달콤한 교훈 비슷한 걸 얻는 동안, 외려 그때 그 과거의, 스스로도 몰랐던 잠재성들은 조금씩 희석되는 건 아닐까, 하는. 지금의 방향틀로 그때의 방향을 포획·고정시키려는 시도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시도야말로 우리 시대 주체들이 가진 ‘자기 보론’이라는 애도/위로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재로부터의 각주와 보론이 필요한 결핍된 텍스트가 아닌, 지금-여기의 모순들을 지각하고 돌파하는 사건들을 과거로부터 배우는 일이다. 예컨대 한겨울 아침 구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건 오로지 살아있(었)다는 감각만은 아니다. 그건 다른 누군가와 ‘함께’ 그런 풍경을 만들고, 그 속에서 그걸 ‘함께’ 살아냈다는 이상야릇한 공감각을 포함한다. 물론 반대로 이런 시도들로부터 지나치게 자유로워서 애초에 스스로의 과거를 망각해버리는 이들도 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낮은 곳, 억울한 곳, 힘든 곳부터 살피겠다”고 해놓고 이젠 청소노동자들의 노동3권마저 부정하는 새누리당 김태흠 의원의 경우처럼.

  그래서 언제나 과거를 회상-해석하는 일은 프루스트의 소실점을 찾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뢰밭을 걷는 일처럼 조심스러워야 한다. 스스로가 묻어둔 소중한 것들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너무 쉽게, 폭발적으로 재단하지 않도록 말이다. 물론 시행착오의 동물이기도 한 인간이 그런 지뢰밭을 피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밟고 싶은 회상-해석의 지뢰밭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다. 밟으면 꽃 한 송이가 통, 하고 튀어 오르는 그런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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