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 평론가는 <문학사상> 10월호에 발표한 글인 ‘비성년 화자의 탄생’에서 비성년 화자(박준, 박성준, 김승일)가 출현하는 최근의 현대시 동향을 평가했다. 그는 비성년 화자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불편하게 만들기는커녕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무대 위에서 마음껏 에너지를 발산하는 놀이에 심취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며 그들이 “생산·생성한 것이 무엇인지가 충분히 밝혀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일견 동의가 가능한 그의 주장은 충분한 숙고도 없이, 마치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된 것처럼 구는 비평전반의 태도를 꼬집는 동시에, 더 이상 현대시를 비롯한 소위 순수예술의 산물들이 가상을 구제하거나 기성세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못함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쯤에서 몇 가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그가 제안한 것처럼 기성 비평에 손쉽게 포섭될 정도로 별반 새로운 것이 아닌 ‘비성년 화자들’이 무엇을 생성·생산했는지 밝혀진다면 더 새로운 시가 탄생될 수 있을 것인가? 나태한 비평가와 게으른 시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고봉준의 메타비평이 새로운 무대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비성년 화자들의 발화 역시 비평가들이 만든 특정 담론을 일시적으로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며, 이는 메타비평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필자는 적절한 시기마다 비평에 대한 비평으로 자신의 이름을 평단에 기억시키는 비평가들의 행위를 졸렬한 것으로 파악한다. 또한 앞 세대가 이뤄 놓은 것에 대한 일시적인 반항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인이 아니라 앞서 말한 나태한 비평가, 졸렬한 비평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메타비평은 불편함을 갈구하는 척 하면서 사실 자신이 불편함을 생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러나 고봉준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이들이 제기한 불편함이 진정한 불편함인가? 20세기 후반 인터넷이 발명된 이후로 비평적 글쓰기는 대중 영역까지 확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비평공간의 확대와 함께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비평, 더 정확히 말하면 비평적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는 더 이상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비평적 글쓰기는 새로운 룰의 출현을 도울 수는 있지만 절대 생성할 수 없다. 때문에 저변의 글쓰기는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자기 담론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의 욕망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고 폭로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그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일 것이다. 그리하여 고백은 선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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