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에서는 왕국의 땅을 자신의 딸들에게 나눠 주려는 리어왕의 질문에 막내딸 코델리아가 “(할 말이)없다(nothing)”고 거절하자 다음과 같이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선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Nothing will come of nothing)”. 여기서 그의 말이 내포하는 것은 어떤 반복이다. 결국 무(無)는 스스로의 자기 동일성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 즉 무에서 무로 향하는 공허한 운동들. 동시에 이러한 운동은 자기 모순적이다. 리어왕이 마침내 인간의 모순에 대한 자각으로 미쳐버렸듯이. 한편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국내 굴지의 기업 삼성과 ‘민주화’됐다는 한국 사회의 일면에서도 이같은 공허한 운동의 모순을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힘겹게 출범한 지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힘없는 협력업체 직원으로서, 흔한 ‘비정규직’으로서 그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70년 무노조경영이라는 비민주적 신화를 써내려갔던 삼성의 반격은 거셌다. 지난달에는 보복인사를 통해 임명된 것으로 의심되는 관리자가 조합원의 머리를 대걸레로 가격해 뇌진탕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고, 노조 간부·조합원에 대한 표적감사, 관리지역 분할로 인한 실질적인 임금 저하 등 끊임없는 백색테러와 노조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슈퍼갑’의 횡포는 고용노동부의 부실한 위장도급 관련 수사 결과로 인해 외려 탄력을 받았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위장도급, 불법파견으로 볼 수 없다”는 고용노동부의 결론은 협력업체 사장들에겐 노조탄압의 주요한 도구로 작용한 듯 보인다.

  지겨운 말이지만 노동3권과 근로기준법은 헌법상의 기본적 권리다. 이러한 법률지상주의적 믿음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에게 어떤 권리들에 대한 권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지금-여기에 ‘있어야 할’ 그 무엇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다지 충실하지 않은 개념적 수사가 되어버린 지 오래고, 우리에겐 여전히 선험된 정치멘토로서가 아닌 계급투쟁의 대상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고민/고안된 적은 별로 없다. 계급 없는 계급투쟁과 조용한 혁명(주체)들의 모순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무한궤도, 혹은 운명적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방법은 없을까? 이쯤에서 리어왕의 명대사를 변주해볼만 하다. ‘삼성의 무노조경영에서는 그 어떤 미래의 민주주의도 생겨날 수 없다’는 단언으로 말이다. 결국 무(노조)라는 비정규직의 노동현실이 동참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적 자본축적의 동학이며, 이는 노동자들의 정치경제적 구조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사회·노동운동의 주체들이 노조출범과 단체교섭 등의 기본권 쟁취를 위한 노력에서 머무르지 말아야 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노동의 제여건에 대한 연대와 투쟁을 통해 다가가야 할 지점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이며, 관계의 교환이 일어나는 전지구적 장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장소는 때로 항상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스스로가 가진 권리와 조건에 관한 고민과 더불어 이러한 공간을 일종의 ‘공집합’으로 형성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회적 작용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악무한의 궤도를 전유하는 것, 그리하여 ‘몫 없는 자’인 코델리아가 “없다”고 말했던 부분을 하나의 집합적 연대로 생성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유의미한 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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