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인 / 자유기고가

 

  올해 여름은 이른바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태’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선 직전부터 제기됐던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은, 국정원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로 정치권의 흙탕물 싸움으로 치달았다. 계속되는 물타기와 폭로전 속에서 지배계급 간의 이전투구는 각 계파의 상징적 개인들의 결투-박근혜 대 노무현이라는-로 치환된다. 망자인 노무현, 침묵으로 일관하는 박근혜 대통령 간의 대결 속에서 남아있는 것은 협잡 섞인 언어들의 교환들 뿐이다.
  이렇게 계속되는 정쟁 속에서 촉발된 촛불집회는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한 공분을 모아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국정원 대선개입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국정원의 전면적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국정원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침범해 선거라는 최소한의 정치 공간에 개입한 것에 굉장한 분노를 느끼며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이 선거라는 신성한 공간에 개입하다니!” 87년 민주화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안정화돼가고 있다고 믿었던 많은 이들에게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의혹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상적 민주주의라는 신화


  훼손된 민주주의와 기만적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의 장인 촛불집회가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 이름 모를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일어났고, 건강한 대한민국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일어났다는 하나의 신화는 촛불을 유지하는 동력이다. 정의롭지 못한 정치인들과 국민 위에 군림하려 드는 국정원. 이들을 척결하고, 기계 다루듯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하고 ‘건강해 보이는’ 인사들로 빈자리를 채워 넣으면 다시금 건강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이 지금 촛불의 심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억압적 국가기구로서의 정보기관은 언제나 정치에 대한 개입과 그 관리를 자기 역할로 해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은 대선 이전에도 ‘넓은 의미의 정치’, 즉 계급투쟁에 지속적으로 관여해왔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을 밝히는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 내내 국정원이 4대강 비판 여론 차단, 반값등록금 투쟁 확산 차단을 조직적으로 시도했을 뿐 아니라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던 노사문제에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해왔음이 폭로됐다. 노조 파괴 시나리오를 통해 민주노조를 계획적으로 파괴하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던 KEC, 발레오만도, 상신브레이크, 유성기업 등 금속노조 핵심사업장들에 이르기까지 국정원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사회의 구조적 변혁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억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국정원의 ‘본래적 자기 임무’인 것이다.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노총, 전교조 등 국가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려우므로 …… 지부장들이 유관기관장에게 직접 업무를 협조하라”는 ‘원장님 지시겙??말씀’처럼 국정원은 체제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회운동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해 억압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한다는 것이다. 5.16 쿠테타를 ‘혁명’이라 부른 박정희가 중앙정보부를 설립했던 목표 역시 반혁명 세력에 대한 효과적 대처였다. 이러한 속성으로 비추어볼 때, 대통령 직속기관으로서 정보를 수집하고 수사할 권리를 부여받은 국정원을 개혁하면 정보기관이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처음부터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환상으로 유지되는 촛불은 국정원 정치개입이라는 틀이 소멸하는 순간, 쉬이 꺼질 수밖에 없다. 책임자 일부가 처벌을 받고, 국정원이 기술적인 몇 가지 개혁조치를 시행하는 순간 촛불은 쉽게 꺼져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촛불이 더 안타까운 이유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촛불의 경계 혹은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불순한 일부 세력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공분은, 그 불순한 일부를 제거하면 정상적인 민주국가로 회귀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만 유효하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멀게는 효순이겧抉굼?두 여중생의 죽음으로 촉발되었던 촛불에서 가깝게는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서 촛불은 ‘정상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역할을 자임해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촛불집회가 불러일으킨 논쟁들은 한국 사회에서 민주적 가치들을 지켜내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불평등한 외교관계, 소통 없는 민주주의에 경종을 울렸던 촛불의 효과 자체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촛불이 자신의 경계를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으로만 한정시켰을 때, 한국 사회의 수많은 ‘비정상’들이 마치 ‘정상’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점에서 촛불은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8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공공성을 띄어야 할 가스겧컖철도 등이 사유화의 위험에 놓여있으며, 저항하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마저 제한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은 과연 정상적인 민주국가인가. 촛불은 이러한 수많은 외침을 자신의 땔감 삼아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러한 촛불이 국정원 개혁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작동’만을 이야기할 때, 촛불의 땔감들은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버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촛불에 의해 개혁된 국정원 역시도 다시금 정상적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 계급투쟁의 곳곳에 개입할 것이다.
  매주 촛불로 환하게 밝혀지는 서울시청 광장 바로 옆에는 향 하나 피우는 것마저 제한 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추모 분향소가 있다. 정리해고로 인해 사망한 24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 앞은 어떠한 집회행위도 허가되지 않으며 수백 명의 경찰들이 혹시나 분향소를 설치할까 싶어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그야말로 ‘계엄지역’이다. 고작 100m 남짓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는 시청광장과 대한문 분향소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촛불이 타오르는 동안 대한문 분향소는 더욱 어두워진다. 촛불이 이야기하는 정상적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대한문의 노동자들과는 먼 이야기일 뿐인가.

근경만을 밝히는 촛불을 넘어서


  지금 촛불은 정상적 민주주의라는 환상의 열차를 타고 있다. 지배계급의 정치 놀음 속에 남는 것은 나는 정의이고 너는 부정의라는 진영논리 뿐이다. 그러나 촛불을 든 시민들이 살고 있던 ‘정의로운 사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의로운 사회였는지 돌아보아야만 한다. 촛불이 그어놓은 선 밖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든 삶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살아야 하는가.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나섰던 시민들은 그 경계를 보존하고 지키면서 불만을 표출하는 것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열차에 탔던 시민들은 기존의 구조를 풍자하고 반발했을지언정 그 구조를 전복하고자 하는 시도, 즉 정치를 확장하려는 시도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2008년의 열차와 2013년의 열차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촛불이 자신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같은 행선지를 향하는 열차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해 보인다.
  촛불, 이제는 환승해야 할 때다. 촛불이 밝히지 못하고 있던 곳을 밝히는 열차로 환승해야 한다. 촛불은 국정원을 넘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들이 있는 대한문과 평택으로, 백혈병으로 쓰러져 죽어간 사람들이 있는 삼성 반도체 공장 앞으로, 불법 파견으로 비정규직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울산으로, 자본의 이윤을 위해 삶의 터전을 빼앗고 있는 밀양으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로 향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 사회의 모순이 응축된 곳 어디라도 밝힐 수 있는 것이 촛불이 되기를, 그리고 그 모순을 뛰어넘으려는 과감한 시도들이 촛불의 목적지이길 바란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