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진 / 문학평론가

 
 
 

  한국에 국한된 시야를 가진 사람들에게 ‘문학과 정치’에 대한 문단의 새삼스러운 주목은 꽤나 긍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갱신의 신앙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문단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는 식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혀보면, 정치적 사안에 대한 관심이 오래 전부터 지속된 세계 예술의 전반적인 흐름임을 금세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정치라는 테제를 경유함으로써, 갱신의 자율에 내기를 걸어온 지난날 위에 정치와 실천의 가능성들이 새로운 배팅으로 더해진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명백한 무임승차다. 티노 세갈의 개념미술에 대한 세이파르뜨의 논평은, 한때는 미래였던 모던 아트가 이제는 그저 피곤한 농담이 되고 말았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당신이 본 그대로, 당신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예술이 택한 방법은 과거에 내던졌던 정치-윤리의 열차 꼬리칸에 뻔뻔스럽게 매달리는 것이었다. 한때의 오만을 뉘우치고, 급박한 현실을 위해 제대로 된 값을 치르겠다고 호소하면서. 물론 현대 예술은 이 ‘숭고한 귀환’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미학적 자유가 전위를 담당했던 지난날을 빌미로 이들은 지금 맨 앞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만약 영화 <마스터>(폴 토마스 앤더슨, 2012)를 보며 저 약탈자들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프레디 켈의 일그러진 인생을 통해, 영화는 현실의 상징체계 바깥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물음을 던진다. 기실 이것은 꽤나 진부한 주제라 여겨질 법도 하다. ‘코즈’의 ‘프로세싱’이 정신분석을 직설적으로 유비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스터>가 끝내 프레디 켈을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초인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실재의 윤리를 결론으로 제공하는 손쉬운 방법을 거절한다. 정의로 통용될 법한 주제에 무임승차하지 않음으로써 <마스터>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지닌바 윤리를 강화해낸다.
  <테러의 시>(김사과, 2012)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작인 <풀이 눕는다>의 결말이 일견 상상적 극복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면 <테러의 시>에서 김사과는 그 일말의 가능성조차도 배제된 지독한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 열중한다. 아무런 구호도, 전망도, 제스처마저도 불가능한 날것의 현실을 던져둔 채 작가는 그 불모의 자리에 <테러의 시>라는 이름을 붙인다. ‘테러’를 하나의 완결된 스펙타클로써 그려내는 행위란 결국 현실의 투쟁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무임승차자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제니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독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 세계에 기계장치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뿐이다.
  오늘날 미학의 자리에 스타일로서의 정치를 대입하려는 은밀한 거래는 구명조끼를 입은 아방가르드를 지속해온 현대예술의 맨얼굴이다. 이 처참한 광경 앞에서 예술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마스터>와 <테러의 시>는 각각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다. 전자가 탈출구 없는 현실 자체라면 후자는 그러한 현실 안에 내던져진 개인의 모습이다. 이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달리는 열차에 매달리지 않고는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게 된 현실에서 이 폭주하는 시스템에 탈출구란 없다. 예술은 이따금 샛길로 빠지는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마저도 결국은 거대한 구조에 포섭된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미 예술이 지켜왔던 가치들―질서에 저항하고, 억압에 맞서며, 경계를 없애는 힘―은 창조성의 발명 이후로 자본주의 사회의 덕목이 되었다. 자율성의 미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이 만들어낸 자유주의에 히치하이킹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결국 오늘날 예술이 저지른 음험한 정치적 타협들이란 자본의 열차에 무임승차했다는 치부를 감추기 위한 ‘하차의 히치하이킹’이었던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은 중단의 결단을 요청받는다. 만약 예술에 중단의 윤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저 환승을 멈추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똑바로 응시하는 용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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