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령 / 독립 큐레이터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지형 그리기>의 편저자 수잔 레이시에 따르면, 공공미술이라는 개념을 다룰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협소하고 형식주의적인 견해를 극복하는 것이다. 공공미술은 야외공간에 작품을 설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는 능력”과 관련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라 레이시는 공공미술을 “폭넓고 다양한 관객과 함께 그들의 삶과 직접 관계가 있는 쟁점에 관해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전통적 또는 비전통적인 매체를 사용하는 모든 시각예술을 지칭하는 것”으로 확장시킨다.

  한국에서 2000년대 중후반 활발히 시도됐던 공공미술 사업은 상당 부분 이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이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2006년 문화관광부의 주도하에 전국 단위로 실시되었던 ‘Art in City’ 프로젝트는 ‘1퍼센트 미술장식물’의 수준에서 이해되었던 공공미술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고 물질적 결과물보다는 공동체에 기반한 프로세스 작업의 가능성을 실험한 사례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남기며 2년 만에 종료됐고 많은 미완의 과제들을 남겼다. 장기 준비 없이 투입된 사업팀과 마을 주민들 간의 갈등, 마을미화 사업과 공공미술 사업의 혼돈, 측면 지원 없이 작가들만을 투입한 결과 드러난 역량 부족, 예술성과 공공성 사이의 갈등 등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했으며, 개선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하지만 더 심도 깊은 논의가 진전되기 전에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로 인해 정부 주도 사업의 규모는 상당 부분 축소되어 공공미술은 논의의 중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레이시의 말처럼 공공미술이 삶의 쟁점에 관해 대화하고 소통하는 모든 미술을 지칭한다면, 공공미술을 둘러싼 쟁점들은 일시적 유행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도시재개발을 둘러싼 충돌이나 4대강 사업 등 공적 공간이 매우 폭력적인 형태로 재편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공공성과 예술의 관계 문제는 매우 긴요한 의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손쉬운 답변을 내놓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이다. 필자는 부산 물만골 프로젝트의 비평가로 ‘Art in City’ 사업에 합류하면서 공공미술이 근대 서구 시민사회가 창출한 미감에 갇혀 있는 한, 혹은 80년대 민중미술식의 틀 아래 조직되는 한 상투성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왜냐하면 그런 접근 방식은 진정으로 보편적인 차원에서 정의 가능한 공공성의 개념에 기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단서는 도처에 있다. 미술 외부로 눈을 돌려 더 넓은 현실을 본다면,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이 다름 아닌 공공성의 개념 주변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키워드가 된 ‘생존’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 공공성은 단순히 전제된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그래서 지켜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이클 하트에 따르면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공기, 물, 바다, 천연자원과 같은 자연환경에서 아이디어, 이미지, 정서, 사회적 관계, 서비스와 같은 비물질적인 생산물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을 구성하는 공통적인 것을 급격히 사유화하고 있다. 공통적인 것은 사적 축적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를 통해 정의될 수 없으며 자본주의적 가치 평가 척도를 벗어난다. 하트는 자연환경과 비물질적 생산물을 공통적인 것의 두 가지 양태라고 부르는데, 자연환경은 그 파괴의 여파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점에서, 비물질적 생산물은 공유에 의해 가치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가치가 더 커진다는 점에서(예를 들어 SNS를 통해 공유되는 정보나 아이디어들) 사적 소유와는 대립되는 위치에 있다. 즉 공공적이다.

  과거 공공미술의 의제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분리를 극복하고 예술을 공적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것이었다면, 오늘날 새롭게 설정 가능한 의제 중 하나는 이와 반대로 사유화에 맞서 공공성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지켜낸다’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결과지향적인 말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한다는 식의 개념을 통해서는 그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반면 일상 속에서 잘 감지되지 못하지만 우리 삶의 토대를 이루는 어떤 것을 가시화하는 작업은 예술의 고유한 능력 중 하나다.
 

 

<도기독>, 이동기 作, 2013.
<도기독>, 이동기 作, 2013.

 


공공성을 지켜내기


  우리는 예술 외적인 영역에서 이러한 작업의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2011년 9월 뉴욕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의 도시들로 번져나간 월 스트리트 점령운동이 좋은 사례 중 하나다. 익히 알려진대로, 이 운동의 특이한 점은 어떠한 구체적인 요구사항도 없이 단지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전부인 활동이었다는 점이다. 점거는 물리적으로 어떤 장소를 차지하는 것 이상의 행위를 지칭하지 않는다. 점거에 참여한 참여자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음식을 나눠먹거나 토론을 했지만, 주최자도 없고, 구호도 없고, 집합 시간과 해산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반자본주의 운동을 정치적 주체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이 운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하트적 의미에서의 ‘공통적인 것’을 환기시키는 활동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잘 들어맞는다(실제로 하트는 이 운동을 적극 지지했다). 주코티 공원을 비롯한 각 도시의 점거 공간은, 실제적 의미에서의 물리적 공간이건 추상적 의미에서의 삶의 공간이건, 공간(의 점유)이라는 형태의 공통적인 것을 가시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한국 사례 중 하나는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한진 중공업 크레인을 309일 동안 점거했던 김진숙 지도위원의 활동이었다. 이 경우는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방식대로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있었지만, 점거 행위로 인해 공간이라는 공통적인 것의 존재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월 스트리트 점령운동과 궤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수영, 홍현숙, 안현숙, 리금홍 등의 작가들로 구성된 그룹 ‘레드 안테나’는 ‘김진숙 오마주’라는 제목 하에 이 문제를 미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페이스북에 김진숙 위원의 제스처를 각자 개성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 사진작품들을 올리고 그것을 공유했다. 필자 역시 이에 동참하여 ‘김진숙 프로젝트’라는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을 다양한 형태로 참여시킨 바 있다.

  물론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과 그 주창자인 하트와 네그리의 이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다. 이 글은 그들의 개념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며, 이론적인 논쟁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 공공미술의 미래를 가늠하고 의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공공성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이론들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도시재개발이나 예술인촌 조성을 둘러싼 문제들(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욕망의 문제, 무임승차의 문제 등) 역시 좀 더 큰 틀에서 접근할 때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새로운 공공미술 작업이 어떤 형태를 띨 것인지 지금 여기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근 파산한 디트로이트시의 사례에서 단서를 얻어 보자는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월 스트리트 신용평가기관에 의한 채권신용등급 하락과 그로 인한 공공영역의 파산이라는 디트로이트 사태는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라는 동시대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보여준다. 그런 와중에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에 버려진 수많은 빈 집들에 예술가들과 도시농부들이 들어가 자급자족의 생활이 가능한 일시적 공동체를 만들었던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여기서 자본과 예술의 대립은 ‘사유화’와 ‘공통적인 것’의 대립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수잔 레이시의 말처럼, 공공미술은 예술의 한 특수한 갈래임을 넘어 그 핵심과제 중 하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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