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상 / 숭실대 철학과 교수

 

  적지 않은 경우 지식인들은 역사의 목적과 확고한 이념들을 제시하기 위해, 또는 이데올로기들과 독트린들을 정립하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인간상을 구축하기 위해 철학이나 사상을 원용했다.(스탈린주의, 현실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여러 우파 민족주의의 경우) 동시에 그들은 단순히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총체적인 관점에서―인간성이나 인간 본질이라는 관점에서―인간의 삶 전체를 규정할 수 있는 도덕적 원리들을 세우고자 했다. 그와 더불어 장-뤽 낭시가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를 정치적ㆍ사회적 차원에서 이론적으로 장악하려는, 즉 공동체 구성을 위한 어떤 답들을 주려는 그들의 모든 시도다. 말하자면 철학적 담론을 통해 공동체에, 공동체의 구성을 위한 어떤 ‘입법적’ 기준들을 도입하려는 것이다.

 

이론적 초과와 열린 상태로서의 외존

  그러므로 낭시가 거부하는 것은 공동체를 구축ㆍ유지시키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표명되는 정치ㆍ사회적나아가 도덕적 차원에서의 모든 ‘입법적’ 담론들(법칙들이나 원리들을 제시하는 담론들)이다. 또는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에 대한 어떤 이론을 ‘답’으로 제시하고 그 답 속에 안주하려는 모든 시도다. 결국 낭시에게 ‘반이론’을 지향하는 어떤 몸짓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공동체의 대상화를 전제하고 이뤄지는 공동체에 대한 담론과는 질적으로 다른, “공동체의 또 다른 유형의 실천을 강요할 이론적 초과(보다 정확히 이론적인 것의 한계의 초과)”다. 그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아마 사실상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단어도 개념도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며, 다만 공동체의 사유에서 우리에게 담론과 공동체의 또 다른 유형의 실천을 강요할 이론적 초과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 대한, 공동체를 위한 어떠한 이론이나 원리뿐만 아니라 담론도 필요 없다는 것인가?

  여기서 이론과 실천의 구분에 대한 마르틴 하이데거의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현존재)에게 가능성(가능태)의 영역과 현실성(현실태)의 영역이 서로 구분되어 있다. 철학을 포함하는 모든 이론은 전자에, 그리고 행동(실천)은 후자에 귀속된다. 그 두 영역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들에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과 행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벽이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무엇을 아는 것과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있으며, 무한할 수도 있는 거리가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너무나 희미한, 너무나 미세한 선이 하나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순간’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입장은 아마 그가 후설만큼이나 크게 영향 받은 죄렌 키에르케고르의 ‘도약’을 연상시킨다. 이 실존주의의 창시자가 강조했던 선택과 결단을 다시 해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이론을 추구하고 배우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 자체는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답은 행동(실천)에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내가 아닌 것’들과 ‘나 자신’이 함께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삶과 모든 관념적ㆍ의식적 작용, 규정 사이의 차이다. 동시에 그것은 동질적인 것들 사이의 다름이 아니라 어떤 질적인 차이다. 이는 공동체의 문제를 부각시킨 낭시에게서 외존(exposition; 타인에게로 향해 있음, 타인이라는 ‘바깥’과 함께 있음)과 타인에 대한 관념적 이해 사이의 차이로 이어진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타자를 이해하려는(의식적인)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낭시의 언어만이 ‘실천’이나 ‘행동’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승격된 특권적 언어는 결코 아닐 것이다. 다만 낭시나 블랑쇼의 언어가 갖는 고유한 점은, 그것이 타자 또는 공동체에 대한 어떤 답을 주기는커녕 타자나 공동체를 끊임없이 물음으로 만들면서 그에 따라 열린 지평을 열린 채로 견지하는 데로 향해 있다는 것이다. 낭시가 말한 대로 타자나 공동체는 “우리 사유의 하나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사유를 시험할 것이다”. 높은 곳에서 답을 주거나 판결하지 않고 타자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그들 앞의 시험대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 즉 외존하는 것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동이 있다.

 

 
 

 

담론을 넘어서기, ‘함께’로서의 주체성

  분명 정치적인 지평에서도 인간의 가능성(이론, 생각)과 인간의 현실성(행동, 실천)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놓여 있다. 낭시와 블랑쇼의 언어들을 포함해 어느 누구의 언어도 결국은 그 자체로 현실성의 실현일 수 없으며, 모든 담론은 결국 인간의 가능성의 영역에만 머문다. 그러나 문제가 된 타자나 공동체를 규정해 대상화하지 않고 열린 물음으로서 끝까지 견지하는 것, 타자를 물음으로 단순히 놔두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물음 또는 문제로서 언어 가운데 현전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가능성의 끄트머리로 나아가는―현실성 내에서가 아닌―가능성 내에서의 ‘행위(acte)’다. 말하자면 이는 “우리에게 담론과 공동체의 또 다른 유형의 실천을 강요할 이론적 초과”, 즉 이론과는 다른, 이론을 넘어서는―문학, 나아가 이론과 철학을 포함한 모든 담론에서 담론을 뚫고 솟아날 수 있는―문학소(文學素)일 것이다.

  이를 통해 타자(또는 공동체)가 현전하고 말하는 담론 영역에서의 열린 공간이 현실성의 성취인 행동의 열린 공간과 겹쳐질 수 있다. 현실과 상황에 대한 어떠한 이론적ㆍ철학적 분석이나 판단도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지식인들이 현실적 상황 밖에서, 더 나쁘게는 ‘위에서’ 어떤 결론을 미리 내리고 어떤 궁극적 답을 줄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정치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관념적인 내면화에 있지 않고, 바로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가능성 내에서의 행위와 현실성 내에서의 행동에 있다는 것이다. 그 외부로 나감, 즉 외존에는 어쨌든 실존을 불확실성 가운데 놔두는(블랑쇼가 ‘비움(abandon)’이라고 부른) 주체성의 움직임이 있다. 실존은 상황과 무관하게 감정 내키는 대로 자신의 어떤 고유성ㆍ주관성 나아가 자의성을 의지하는 데 있지 않으며, 정반대로 그 상황의 중핵으로 정확하게 자기를 위치시키는 데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동하지 않는 것’을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행동 이전에 ‘행위’가 관건이다. 행위는 행동 이전에 언어ㆍ지식ㆍ이론ㆍ담론과 관계하는 방식이다. 행동 이전에 상황의 한복판을 온 몸으로 느끼는 행위(단순한 지식의 습득이나 그 안에 안주하는 것과는 다른 이행(移行 혹은 履行), 즉 느낄 줄 아는 행위)가 관건이다. 그 행위가 부재한다는 것에, 상황만이 내줄 수 있는 주체성을 망각한다는 것에 언어와 지식이 가져오는 모든 병폐의 근거가 있다. 그 실존적 주체성, 어떠한 ‘주체’나 ‘자아’의 주체성도 아닌 이미 타자가 개입되어 있는 ‘함께’로서의 주체성 안에 어떤 주어진 답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동의 디딤돌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주체성이 없다면 이미 주어진 사회 안이나 위가 아니라 그 밖이나 아래에서 터져 나올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동은, 즉 현재가 아니라 미래가 ‘재판’에 회부될 행동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정치적 실천이 요구되는 곳에서조차 지금까지 지식인들에게서 이론이 지나치게 중요하고 무거운 자리를 차지해 왔던 것은 아닌지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나아가 어떤 ‘실존주의’가 정치의 영역에서 처음부터 완전하고 단순하게 망각되어버리진 않았는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맑스주의와 실존주의라는 단순한 대립을 전제하고 후자를 처음부터 정치적인 것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 그냥 어둠속에 묻어버린 것은 아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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